6.25전쟁에 참전한 護國英雄이자 국가발전에 큰 역할 한 大韓民國名匠

 

김종익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강남지회 회장

6.25전쟁에 참전한 護國英雄이자 국가발전에 큰 역할 한 大韓民國名匠

일본의 참혹(慘酷)한 대한제국 압제(壓制)는 1945년 8월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原爆)으로 막을 내렸다. 비참(悲慘)함의 연속이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이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이제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으로의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12시 일본의 무조건 항복(降伏)으로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북쪽에서는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와 점령지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미군은 9월 2일 일본으로부터 정식(正式) 항복문서를 받고 맥아더사령부 지시1호(일반명령 제1호)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分割) 점령(占領)한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1945년 9월9일부터 북위 38도선 이남(以南)에 미군정(美軍政)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른 외세(外勢)의 ‘손’에 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며 북쪽은 공산주의, 남쪽은 민주주의라는 이념 갈등(葛藤)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곧 우리 민족 최악(最惡)의 비극(悲劇)인 6.25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당시 북쪽에 거주하던 주민 중에는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종익(金鍾益)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강남지회 회장이 있었다.

김 회장은 1945년 해방을 맞은 직후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하게 된다. 연고(緣故)가 없는 서울에 정착하게 된 김 회장의 부친(父親)은 가족의 생계(生計)를 위해 빵 공장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어린 나이였던 김 회장도 부친의 빵 공장에서 일을 거들게 되었다.

김 회장은 “고향이 황해도 연백인데 8.15해방을 맞아 가족이 서울로 이주(移住)하게 되었고 서울에 연고가 없었던 부친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곰베빵’을 만드는 공장을 하게 되었다”며 “우리 가족 모두는 부친의 일을 함께 도왔으며, 나 또한 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를 열심히 거들며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 황해도 연백에서 가족 越南…父親 사업 도우며 서울생활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때 1950년 6.25전쟁이 발발(勃發)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이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북위 38선 전역(全域)에 걸쳐 남한을 침범(侵犯)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전쟁 준비를 전혀 하고 있지 못했던 남한은 북한 탱크 앞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고 점점 뒤로 밀리는 상황(常況)에서 김 회장은 중학생 신분(身分)으로 조국(祖國)을 수호(守護)하겠다는 애국정신(愛國精神)으로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에 자원(自願))했으며, 그 참혹(慘酷)했던 전쟁을 온 몸으로 굳건히 이겨냈다.

그야말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지옥’을 경험한 김 회장은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참혹성과 공산주의의 실체(實體)를 알리기 위해 군(軍)장병 위문(慰問)과 초․중․고․대학생을 찾아다니며 반공의식과(反共意識) 애국사상을 심어 주는데 여념(餘念)이 없다.

그 첫 번째가 ‘평화수호(平和守護)를 위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이다. 역사(歷史)를 바로 알아야 올바른 국민으로 성장(成長)할 수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소신(所信)이다. 김 회장은 교육이 있는 날에는 반드시 빵을 구울 수 있는 ‘명장 김종익의 찾아가는 사랑나눔 베이커리’ 푸드트럭과 함께 출동(出動)을 한다.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김종익표’ 갓 구운 따끈한 빵을 교육생들에게 제공(提供)하기 위해서다. 이 이벤트는 선풍적(旋風的)인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교육 효과도 만점(滿點)이다.

6.25전쟁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해 참혹한 전쟁 몸으로 겪어

김 회장은 “현재 남북 간의 평화무드가 조성(造成)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스럽다”고 말한 뒤 “그렇지만 우리는 공산주의의 실체(實體)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에 알맞은 대처(對處)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는 평화통일(平和統一)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역설(力說)했다.

김 회장은 계속해서 “요즘 젊은이들 중엔 ‘김정은 팬클럽’이 생겼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며 “6.25전쟁을 겪어 본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얼마나 지독(至毒)하고 잔인(殘忍)한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思想)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군 장병과 초․중․고․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평화수호(平和守護)를 위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 회장이 학생 강연 때마다 참석자에게 나눠준다는 ‘빵’은 어떤 연유(緣由)를 갖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 회장은 제과(製菓)제빵 대한민국명장(大韓民國名匠)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분야에선 우리나라 ‘최고 중 최고’의 베테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 회장은 어떻게 제과제빵업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해방을 맞아 월남한 김 회장의 부친은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지 위해 빵 공장을 시작했고, 부친의 일을 돕던 어린 김 회장은 자연스럽게 ‘빵’과 친해지게 된 것이다.

‘평화수호를 위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 통해 학생들에 공산주의 실상 알려

당시를 회상(回想)하던 김 회장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도와야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점점 제과제빵에 대한 매력(魅力)을 알게 되었고, 좀 더 맛있는 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70여년의 세월을 제과제빵과 함께 한 김 회장은 이 분야에선 ‘살아있는 레전드’로 존경(尊敬)받고 있다. 어느 직업이든 한 분야에서 70년 이상을 종사(從事)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歷史)’인 것이다.

김 회장은 6.25전쟁을 몸소 겪었고, 전쟁으로 인한 삶의 팍팍함을 진하게 체험(體驗)했지만 학업(學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과제빵 분야로 삶의 방향을 잡은 김 회장은 이 분야 전문 지식습득(知識習得)은 물론 지적(知的) 수준은 높이기 위해 주경야독(晝耕夜讀)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기업인(企業人)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 동안 김 회장이 개발(開發)한 빵과 과자는 수천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 초코파이’의 탄생 뒤에는 김 회장이 독창적(獨創的)으로 개발한 ‘스펀지 드롭’이 있다. 이 제품은 당시 베스트셀러였지만 1974년 그 회사에서 유사(類似)한 제품을 출시(出市)함으로 해서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김 회장의 창조(創造)적 발상(發想)은 현재에도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17년 ‘카스테라 제조 성형틀’을 이용한 연구개발로 발명특허(발명 제10-1800521호)를 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證明)한다.

2003년에 국가로부터 제과제빵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 ‘살아있는 레전드’

김 회장은 우리나라 제과제빵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이 분야의 선진국인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留學)했다. 그는 1971년 일본 동경제과학교를 졸업했으며 1973년에는 일본 빵과학연구소(JIB) 연구과정을 수료했고, 1985년에는 프랑스로 건너 가 ‘잇산죠’ 국립제과학교를 수료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熱情)은 1993년 이탈리아 ‘마크 젤라토’ 연수(硏修)로 이어졌다.

유학시절에 대해 김 회장은 “1971년 일본 동경제과학교에 유학을 갔을 때는 초보자로 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제과 기술자(技術者) 입장(立場)에서 선진제과기술을 배우러 간 상황이라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생업(生業)을 접고 배움의 길을 갔기에 제일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경제적(經濟的)인 어려움이었다. 그래서 연구용으로 사용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였다”고 당시를 회상(回想)했다.

이러한 고난(苦難) 속에서도 포기(抛棄)를 몰랐던 김 회장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 집중(集中)과 정열(情熱)을 가지고 몰입(沒入)할 때 삶의 보람과 행복이 있다는 진리(眞理)를 터득(攄得)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김 회장의 노력은 우리나라 제과제빵의 수준을 세계 최고의 경지(境地)에 올려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 분야 후배들의 실력 역시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든든한 기반(基盤)이 되었다는 평가(評價)를 받고 있다.

그의 실력은 다양(多樣)한 사회활동(社會活動)에서도 독보적(獨步的)이다. 대한제과연구연합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사)한국제과기술협회 회장, 국제제과제빵경진대회 심사위원장, 기능장(技能長) 실기시험 감독관, 세계양과자 콩쿠르 한국대표선발전 심사위원장, 미국 캘리포니아 레즌빵대회와 크림치즈케이크대회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歷任)했다.

이렇듯 치열(熾烈)한 삶을 살아 온 김 회장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천리(天理)을 잊은 적이 없단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세(姿勢)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하루하루 최선 다하는 삶 營爲”

김 회장이 과거부터 마음 속 깊이 새겨놓은 명언(名言)이 있다. 그는 “프랑스 조각가 로댕은 자기 직업에 대한 애정이 그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스스로 자기 직업을 존귀(尊貴)하게 여기고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또 “독일의 거장(巨匠) 괴테는 천직(天職) 사상을 강조했는데 이는 투철(透徹)한 장인정신(匠人精神)을 강조한 것”이라며 “이 같은 말이 내 인생을 흔들리지 않게 이끌어 준 나침판”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확고(確固)한 철학(哲學)을 갖고 있는 김 회장은 인생의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을 강조한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여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達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3년에 제과제빵 부문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김 회장은 “누구보다도 기쁨이 컸다. 제과제빵업계 대한민국 최고 기능인이라고 국가가 인정한 ‘제과명장’은 큰 영광”이라며 “내 청춘(靑春)의 꿈과 평생의 정열을 고스란히 바쳐온 나의 삶에 대한 보상(報償)이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최고의 기술인이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目標)가 있었기 때문에 좌절(挫折)과 어려움을 극복(克復)할 수 있었다. 반드시 이 분야에서 성공하겠다는 확고한 신념(信念)이 없었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늘 후배(後輩)들에게 명확(明確)한 목표를 가지고 기초(基礎)부터 다져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제과제빵업계의 ‘살아있는 전설(傳說)’로 불리는 김 회장에게는 남다른 이력(履歷)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김 회장이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700여명 가운데 유일(唯一)하게 6.25전쟁에서 조국(祖國)을 수호(守護)한 ‘호국영웅(護國英雄)’이라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현재 생존(生存)한 6.25참전유공자 13만여명 중 유일한 ‘대한민국명장’이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종익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강남회장이자 대한민국명장의 진면목(眞面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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