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완석 입체패턴연구소 소장(대한민국명장)

국내 ‘입체패턴’ 선구자…‘패턴사’ 최초로 세계패션그룹대상 수상

“命をかけて来た․(이노치오 카케테 키타․목숨 걸고 왔다)”

지금의 서완석 대한민국명장을 있게 한 결의가 가득 찬 일본어 한 문장이다.

서 명장은 1981년 서울에서 있은 ‘그레이딩 세미나’(옷의 크기를 키우고 줄이는 기술)에 참석해 일본인 강사로부터 ‘입체패턴’에 대한 강의를 듣고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9년 동안의 국내 재단사 생활을 접고 1982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입체재단으로 세계적인 명성이 높았던 ‘반탄디자인연구소’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연구소 측에서는 서 명장을 ‘초급’반에 배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루라도 빨리 고급 기술을 습득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서 명장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 명장은 연구소 책임자를 만나 ‘이노치오 카케테 키타’를 외치며 중급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설득해 결국 좀 더 높은 단계의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만난 스승이 입체재단의 최고봉 가라키 이사무 선생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 서 명장의 투혼은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었다. 낮에는 반탄디자인연구소에서, 저녁에는 신주쿠에 있는 ‘일본문화복장학원’ 단과 코스를 다녔고 주말엔 ‘가라키 이사무 선생의 아틀리에’에서 패턴 뜨는 일을 도우면서 산업패턴를 익혔다.

서 명장은 “당시 출국에 필요한 서류만 해도 30여 장, 허가를 받는 데만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내가 다녔던 국제복장학원 최경자 이사장의 보증으로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다”며 “이렇듯 어렵게 유학을 갔는데 일분일초를 휘뚜루 보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힘겨운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1984년에 귀국한 서 명장은 그해 7월 서울 명동에 ‘입체패턴연구소’를 설립하고 ‘입체패턴’ 보급에 나섰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우리나라 패션업계에서도 입체패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져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 일본 유학, 세계 일류 입체패턴 기법 완전 습득

35년이 흐른 지금 서 명장의 제자는 2,000명이 훌쩍 넘어 섰고, 그들은 국내 대형 의류기업의 개발실과 패턴실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 패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 명장이 패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한양중학교를 다녔던 서 명장은 학교 뒤편 동대문운동장 수영장에서 노니는 비키니․원피스 수영복을 여성들을 보고 마음이 뛰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그때는 유교적 사상이 강한 시대라 남자가 여성복을 만든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패션계의 레전드인 앙드레김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남자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시대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서 명장은 1974년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의상실을 하던 친척의 권유로 명동에 있던 국제복장학원에 입학하는 것으로 패션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1984년 서 명장이 설립한 입체패턴연구소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입체패턴에 대한 인식이 낮은 때라 업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입체패턴은 시간도 많이 걸릴 뿐 아니라 고된 작업이었던 반면 평면패턴은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 명장은 패션도 고품질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따라서 업계의 외면에도 실망하지 않고 패턴용역, 기업체 연수와 기술전수, 자문 등을 통해 인식 개선에 박차를 가했으며 국내 실정에 맞게 입체패턴을 적용하기 위한 연구에도 열정을 쏟았다.

이러던 중 1990년대 들어 외국에서 다양한 디자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화려하면서도 몸의 선을 최대한 살린 의상이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입체패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앙드레 김’ 영향 받아 패션업계에 입문, 2004년 대한민국명장

서 명장은 “'나만의 특별한 옷'을 입으려는 사람이 늘면서 다품종 소량의 고품질로 승부하는 시대가 된 것”이라며 “이때부터 교육기관에서 입체패턴 과정이 신설됐고 대기업의 입체패턴사 양성 교육도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입체패턴 1세대인 서 명장도 주목을 받기 시작해 국내 굴지의 패션업체인 제일모직, 엘지패션, 진도, 쌍방울 등에서 회사 소속 재단사들에게 입체패턴 교육을 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렇게 ‘서완석 패턴시대’를 맞이한 서 명장이 한번 더 비상(飛上)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97년 ‘제1회 서울패션위크’다. 이때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인 프랑스의 ‘마드레느 비오네’의 디자인을 재현한 옷 10여점을 출품했는데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서 명장은 “마들레느 비오네의 작품은 입체재단으로 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드레스의 스커트가 이음선 없이 한 판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풀기 어려운 작품”이라며 “당시 유명 패션지에도 기사가 나갔다”고 말했다. 당시 전시회에 참여했던 프랑스 패션전문기자가 그의 작품을 보고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성이 가미된 옷’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렇듯 패션업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과시한 서 명장은 지난 2004년 국가에서 최고의 숙련기술인으로 인정하는 양장(洋裝) 부분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됐다.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때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는 서 명장은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다고 한다.

2013년 세계패션그룹(FGI) ‘패션대상’…또 하나의 ‘역사’

서 명장에게 2013년은 또 하나의 ‘역사’다. 세계패션그룹(FGI) 한국지부에서 주는 ‘패션대상’을 받은 것이다. 이 상은 디자이너들이 독식하던 상이었는데 패턴사로서는 최초로 서 명장이 수상한 것이다. 그만큼 서 명장의 입지가 국내 패션업계에서 탄탄히 구축돼 있음을 알 수 있는 쾌거였다.

이제 서 명장이 설립한 입체패턴연구소에는 외국 명문 디자인스쿨로 유학 간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수강하러 온다. 아예 휴학을 하고 오는 학생들도 있다. 미국의 ‘파슨스디자인스쿨’이나 영국의 ‘센마틴스쿨’에서는 자세하게 입체패턴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란다.

이제는 입체패턴을 배우려는 학생이 많아져 줄을 서 있지만 서 명장은 절대 ‘소수 정예’를 고집한다. 패턴을 배우기 위해선 전문적으로 1:1 수강체제가 이뤄져야 완벽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철학이 돈보다는 국내 패션계의 발전을 우선시 한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옷은 사람의 몸을 구속하지 않는다.’ 서 명장의 패션철학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서 명장은 고민한다.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 학위도 받았고 현재 세종대와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패턴의 기법’ ‘패션 드레이핑’, ‘남성복 패턴의 기법’ 등 패턴 관련 전문도서 3권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이 분야에 ‘바이블’로 통한다.

“패션전문학교나 명장문화원 세워 후진양상에 매진하고파”

서 명장은 ‘패션전문학교’나 ‘명장문화원’ 설립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반드시 성사되어야 할 프로젝트임에 틀림없다. 서 명장은 “패션을 배우러 수천 명이 외국으로 나가는데 우리나라에 전문교육기관이 생기면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며 “정부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 명장이 우리나라에 입체패턴을 도입한 선구자이자 양장패션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는데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서 명장은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나라 패션산업이 세계무대를 주름잡으려면 훌륭한 패턴사가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하고 싶은 형태를 마음껏 만들 수 있고, 창의적인 예술성은 물론 소재 자체의 기능성을 의상에 완벽하게 투영해 낼 수 있는 입체패턴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 명장은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부족하면 더 노력하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장으로 선정 된지 15년 만에 수석부회장을 맡다”

서 명장은 (사)대한민국명장회 이사와 부회장으로 13년째 봉사하고 있다. ‘꾸준함’과 ‘희생’이 곧 그의 삶인 듯하다. 그동안 모신 회장님이 다섯 분이고, 명장회의 지나온 과정을 누구보다도 생생이 기억하고, 함께 지금껏 달려 온 서 명장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엿 볼 수 있다.

‘직책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봉사의 기회를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저작권자 © The PeoPl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