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불의 심판’을 기다리며 마음 조리고 살아온 이 시대 최고의 도공(陶工). 바로 서광수 대한민국 도자기 명장이자 한도요(韓陶窯) 대표의 삶이다.

서광수 한도요 대표

60년 도자기 인생이 빚어내는 ‘작품’은 세상에 빛이 되다

평생을 ‘불의 심판’을 기다리며 마음 조리고 살아온 이 시대 최고의 도공(陶工). 바로 서광수 대한민국 도자기 명장이자 한도요(韓陶窯) 대표의 삶이다.

요즘은 거의 보기 힘든 전통가마 방식으로 도자기를 굽고 있는 서 명장은 정성들여 빚은 ‘자식’들이 꼬박 서른여섯시간 동안 1,300℃의 엄청난 열기를 견뎌내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간장이 녹는 고통을 반복하며 살아 왔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덧 59년.

가마가 식고 그 안을 열고 보는 순간, 서 명장의 손에는 ‘망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굵은 땀방울을 수없이 흘리며 빚었고 강원도산(産) 소나무의 엄청난 열기를 견디며 익어 있는 자식 같은 도자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이 순간 서 명장의 눈초리는 흔들림이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서 명장의 망치’는 가차 없다. 아주 작은 오점(汚點)이라도 보이면 바로 ‘쨍그랑’.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생을 마친 도자기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을 보는 서 명장의 마음은 어떠할까.

이렇게 ‘불의 심판’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서 명장은 “같은 흙과 유약을 갖고 똑같이 방식으로 만들어도 가마 속에서 벌어지는 불의 향연을 어느 정도 즐기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운명이 결정된다”며 “그래서 전통가마에서 굽는 도자기는 독창적이며 최고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형문화재 사기장 41호이자 2003년에 도자기공예분야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서 명장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흔히 이곳은 우리나라 도자기계의 성지(聖地)라고 일컬어진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도자기’와 가까워졌고 초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전통가마’ 방식 고집하는 무형문화재이자 대한민국명장

당시 우리나라 ‘백자의 대가’로 정평이 났던 지순택 선생의 눈에 띤 서 명장은 스승으로부터 물레 성형과 조각, 그리고 유약을 바르고 불가마에 넣어 굽는 전통 도자기 제작 과정을 꼼꼼하게 익혔다.

그래서 서 명장의 ‘작품’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특히 독일 국립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외국 정상 등 주요 인물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도자기 좋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한다는 일본인들에게 서 명장은 ‘신의 경지’로 평가받는다.

일본에서는 20여 회가 넘는 개인전을 가졌으며 2009년에는 일본 국영방송 NHK에서 한국도자기 명장 특집으로 서 명장을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이로 인해 ‘한도 서광수를 사랑하는 일본인 모임’이 결성됐다.

서 명장의 작품세계는 매우 넓고 깊다. 그러나 결코 중복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유니크’하다. 아마도 그의 ‘도자기정신’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가마에 넣기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가마에서 꺼낼 때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어린 나이에 도자기 세계에 빠져 든 서 명장은 이를 ‘운명’이라고 말한다. 하루하루가 힘에 겨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 후에도 호롱불을 켜놓고 물레를 차곤 했다. 의지와 신념이 없었다면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 명장의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했고 이러한 자세는 지금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서 명장의 도자기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1976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제3공화국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도평요’를 마련하고 서 명장을 스카우트한 것이다.

1,300도 불 속에서 서른여섯시간 견디고도 30%정도만 ‘생존’

서 명장은 당시 대기업의 평균 월급이 7만 원 정도이었는데 나는 20만원 넘게 받았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도자기 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요장(窯長)으로 일했다.

서 명장은 “이후락 씨는 도자기를 만들면서 급한 성격을 조금씩 고쳐 나갔다. 그는 도자기를 불가마에 넣어 굽기 전 글을 쓰는 작업을 했다. 도자기가 불가마에서 나오면 30~50%는 버려지는데 좋은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격이 유해진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도평요’ 10년 생활을 정리한 서 명장은 드디어 1986년 자신의 이름을 건 ‘한도요(韓陶窯)’ 시대를 연다.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에 위치한 한도요는 마을을 지나 길이 마무리되는 산 중턱 남향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는 전통가마 터와 강원도에서 실어 나른 거대한 소나무 장작더미가 자리 잡고 있으며 작업장 옆으로 어느 정도 크기의 공터가 있는데 박물관이 들어 설 자리라고 한다.

이때부터 서 명장은 자기만의 도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전통’을 고수하며 역경을 이겨냈고 최고의 위치로 한 걸음씩 다가간 것이다. 서 명장이 고집하는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려면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1년에 네 번 정도 가마를 연다.

한 번 가마를 열 때마다 100여개의 도자기를 넣고 굽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불 맛’인데 한도요에서는 강원도에서 자란 소나무만 사용한다. ‘불의 힘’이 은근하고 세다는 것이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투자다.

이렇게 갖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도 모든 도자기를 품에 안을 수 없다. 서 명장은 “색이 이상하거나 조금만 흠이 있어도 용납하지 않는다. 도자기를 깰 때 3개월 동안 애지중지 만든 건데, 속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깨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전통가마방식을 버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서 명장은 "그래야만 우리나라 도자기의 멋을 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요즘 생활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전기나 가스 가마는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을 만들 때 적합하다. 이 방식으로 만들면 백이면 백 모두 똑같다. 그러나 전통가마에서는 백이면 백 개가 모두 독특하다“고 말했다.

전통가마방식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불의 세기와 가마 안에서 기물의 위치에 따라 어떤 빛깔이 나타날지 기대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오로지 도공(陶工)의 땀방울과 기도만이 있을 뿐이다.

‘도자기박물관’ 건립해 전통 맥 영원히 이어갈 터

서 명장은 특히 ‘달항아리’가 유명하다. 도공에게 있어 달항아리는 큰 꿈이지만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문양이나 조각이 전혀 없이 오직 불이 빚어낸 색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달항아리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남과 북이 통일을 염원하는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커다란 달항아리를 아래와 위로 나누어 두 개를 이어 붙여서 만들었는데, 이는 남과 북이 더 큰 하나로 완전하게 거듭남을 상징한 것이다.

서 명장의 명성은 국내외에 결성돼 있는 후원회로도 입증된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인사부터 그의 작품에 매료된 평범한 사람들까지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서 명장이 올곧게 6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가장 화끈한 ‘불’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내년 2021년이면 서 명장 도자기 인생이 환갑을 맞는다. 그의 큰 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전통도예의 맥이 계속 이어어가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전통’을 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서 명장에게 ‘무형문화재’는 단순히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국가적 ‘염원’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도자기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부지(敷地)도 마련했고, 전시 작품도 애지중지 모으고 있다. 자신의 작품은 물론 다른 도공의 작품과 골동품도 모으고 있다.

서 명장은 “도자기가 곧 내 인생”이라며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통방식을 고집했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서광수 한도요 대표
서광수 한도요 대표

 

저작권자 © The Peopl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