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우리나라 고고학의 대가인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곳은 경기도 김포시 마송리에 위치한 ‘토탄농경유물전시관’이다. 토탄(土炭)은 강이나 호수 주변의 낮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던 곳으로 오랜 기간 각종 식물의 씨앗, 곡식들이 퇴적돼 탄화 정도가 낮은 석탄의 일종을 말한다.

“고고학은 인류역사 되살리는 학문…‘현재’의 존재 가치 재창조 작업”

자타공인 우리나라 고고학의 대가인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곳은 경기도 김포시 마송리에 위치한 ‘토탄농경유물전시관’이다. 토탄(土炭)은 강이나 호수 주변의 낮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던 곳으로 오랜 기간 각종 식물의 씨앗, 곡식들이 퇴적돼 탄화 정도가 낮은 석탄의 일종을 말한다.

2014년 3월 개관된 이 전시관은 김포 농경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집대성()한 곳으로 한반도에서 최초로 아주 이른 시기에 쌀농사를 시작했다는 고고학적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전시관의 탄생에 임 교수의 혼신이 담겨져 있다.

한반도 최초의 쌀 재배지임을 증명하기 위해 1991년 임 교수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 고고학 조사단이 고대미(古代米)와 주변에서 발견된 농경 도구 등을 발견한 곳이 바로 이 전시관 자리인 것이다. 현재 이 곳은 김포신도시가 형성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조사 당시만 해도 논밭이었다.

이 곳에서 발견된 고대미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지금부터 4020년 전 것으로 밝혀져 김포가 우리나라에서 이른 시기에 쌀농사를 시작한 지역이라는 것이 최초로 입증된 것이다.

김포 古代米는 4020년 전부터 쌀농사 입증

임 교수는 “토탄은 벼 재배 등 농업발전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저장되어 있는 보물창고”라며 “따라서 김포가 최초의 쌀 재배지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정연하게 기록하고 만대에 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전시관이 꼭 필요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고학(archaeology)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남긴 유적·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되어 있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의 점(點)들을 이어주기 위해 감춰져 있는 ‘사실’을 찾아내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야 한다. 이 과정이야말로 ‘고행(苦行)’ 그 자체인 것이다.

임 교수는 “고고학은 인류역사를 되살려 내는 학문”이라며 “만일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만큼 고고학의 존재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의 엄청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만일 인류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조상을 발로 짓밟으며 살아가는 꼴이 됐을 것이다.

김포 토탄농경유물전시관 역시 그런 시각에서 보면 매우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고대미가 발굴됨으로써 한반도에 볍씨가 들어 온 경로가 밝혀진 것이다. 즉 북쪽 대륙을 통해 들어 온 것 말고도 중국에서 직접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전파됐다는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쌀이 전파된 것은 일본으로부터라는 낭설(?)이 확실한 사실처럼 인식이 돼 있었다. 그러나 임 교수의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허구는 한 방에 날려 버렸으며 한반도에 쌀이 들어 온 과정도 분명하게 증명된 것이다.

토탄유물농경전시관에는 벼농사 관련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재현에 놓고 있다. 물론 그 발원(發源)은 임 교수가 애써 찾아낸 고대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곳에는 벼농사의 시작, 토탄 및 토탄생성과정, 벼농사 농경유물이 정리되어 있고, 아울러 농경유물, 민속예술품, 농경생활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1975년 ‘부유법’으로 찾아낸 여주 탄화미, 일본보다 600년 앞서

임 교수의 활동영역은 김포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국은 물론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1975년 11월은 아마도 임 교수에게 가장 감명 깊은 때일 것이다.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 발굴에서 찾아낸 탄화미는 일본보다 6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발견한 과정이 가히 드라마 같다. 임 교수는 집터의 가운데에 있는 화덕 자리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자신의 연구실로 가져 온다. 당시 그 광경을 본 동료 교수들은 ‘대체 뭘 하려는거야’라는 의아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 교수의 목표는 뚜렷했다. 바로 탄화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탄화미를 찾아내는 기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임 교수는 196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스튜어트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익힌 다음이었다.

이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이 담긴 양동이에 담근 다음, 화학물질을 섞어 떠오르는 곡류를 고운 눈금을 가진 조리 모양의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되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이 부유법을 여주시 흔암리 발굴 때 최초로 적용한 것이고 이 방법을 통해 탄화미를 발견함으로써 일본보다 600년이 앞섰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의 또다른 의미는 당시에는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거의 전부였으나 이처럼 자연 유물에 관한 관심은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발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임 교수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는 매우 크다”며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방법을 개발한 미국 학계에서도 이런 성과에 대해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직 땅속에 있는 인류역사의 99% 찾기 위해 오늘도 출동”

이렇듯 국내외 고고학 발전에 혁혁한 역할을 한 임 교수는 무슨 연유로 고고학계로 들어섰을까. 그는 “경기고 재학 시절 방과 후 여러 특별활동 중에서도 지방 현지답사를 자주 가는 역사 지리반에 매력을 느꼈다”며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지금도 가기 힘든 곳인 독도 답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고3이 돼 진학을 고민하던 중에 담임교사로부터 ‘취미’를 살릴 수 있는 학과를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게 된다. 당시 담임교사는 “자네는 지상(地上) 여행은 할 만큼 했으니 대학에 가서는 무한한 지하세계를 여행하는 고고학을 전공해 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고3 담임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며 “서울대 고고학과에 입학해 지하의 무한한 세계와 맘껏 대화하겠다는 다짐을 한 때가 엊그제만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고고학에 대한 인지가 넓지 않았을 때라 오해를 받기도 했단다. 한마디로 ‘공부를 못해서 그런 비인기 학과에 들어갔다’거나 ‘무덤이나 뒤지며 시간을 보내고 살터이니 앞날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임 교수는 남들의 이해 못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고고학자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구축해 나갔다. 대학 졸업 후에도 고고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임 교수의 말에 지도교수는 “이 학문은 지하에 묻혀 있는 옛 유물을 찾아 조상의 역사를 밝히는 것인 만큼 부귀영화와는 담을 쌓은 채 고독한 연구를 해야 하는데 자신있느냐?” 되물었고, 임 교수는 고고학에 대한 더욱 뚜렷한 의지를 나타냈다.

임 교수는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이 200만~300만 년 전이라고 할 때 문자로 기록된 인류 역사는 불과 5천년 정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인류역사의 99% 이상은 땅에 묻혀 있는 것”이라며 “이러한 역사를 찾아 되살리기 위해 국내는 물론 일본, 유라시아. 전 세계를 다니는 나의 ‘두더지’ 여행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The PeoPl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