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지 대한민국명장회 고문

 

대한민국 명품양복의 살아있는 ‘歷史’…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專念

 

“명장회의 현재 모습을 보면 감개무량합니다. 조직 규모가 확대됨은 물론이고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왕성해진 것을 보면 명장회의 위상이 그 만큼 높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97년 제3대 회장을 역임한 문병지(文炳智) 고문의 일성(一聲)이다.

1992년 복장 부문 명장으로 선정된 문 고문은 현재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국제대학교 평생교육원 명품양복제작반 책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 고문은 자신이 50여년 동안 쌓아온 기술을 오롯이 학생들에게 쏟아 붓고 있다. 1대1 반(半)도제식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이 과정은 지금까지 4기 80여명의 학생을 배출했는데 100%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문 고문이 회장이었을 당시에는 명장회 사무실이 서울 서초동에 있었다고 한다. 단지 사무실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명장들의 작품 상설 전시 및 판매점이 갖춰져 있었다. 작품 판매 수익을 올리게 위해서였다.

이러한 공간을 마련하게 된 이면(裏面)에 하나의 사연이 있다. 당시 명장의 열악한 여건과 대우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문 고문은 명장회장의 자격으로 노동부장관을 만나서 명장에 대한 국가적 대우 격상과 처우개선을 강력하게 건의해 관철되었다고 한다.

깔끔한 모습의 테일러에 반해 이 분야에 입문했다는 문 고문의 업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서울과 지방간 양복기술 격차를 줄였다는 것이다. 60년대에는 지방의 양복기술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문 고문은 자비(自費)를 들여 지방을 순회하며 강의를 했다. 당시 지방에서 양복제작을 하던 사람들은 문 고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백 명이 몰렸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보통 ‘쟁이’들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는커녕 감추기에 급급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문 고문은 스스로 모든 실력을 나눠줬다. 이에 대해 문 고문은 “어느 분야든 후배에게 기술을 전수한 만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며 “나는 기술전수는 물론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 그리고 인성과 소양에 대해 더 많이 강조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99년 문 고문은 미국으로 날아간다. 그의 소문이 미국에까지 닿은 것이다. 세계적인 양복제작 명인인 ‘잭 테일러’의 러브콜이었다. 당시 문 고문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큼지막한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은 갈망(渴望)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도 문 고문의 실력은 ‘베테랑’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LA, 뉴욕, 워싱턴 등지에 자신만의 매장을 운영하며 입지를 굳혔다.

이러한 미국생활은 12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귀국해 경기도 이천시에 ‘코리아테일러아카데미’를 개설하게 되었고, 2013년부터 국제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렇게 문 고문이 후진양성에 열성을 보이는 이유는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서다.

문 교문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 세계 최고의 테일러를 양성하는데 남은 인생을 걸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문 고문은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양복기술은 세계 1위다. 1976년부터 국제기능올림픽 12연패를 했다는 것은 감히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역사”라며 “이 역사가 계속 이어지도록 젊은 테일러들을 양성해 국내는 물론 세계무대를 제압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58년 대한복장학원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문 고문은 서울 소재 대형 양복점에 스카우트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문 고문은 양복제작 관련 서적 집필에도 열정을 보였다. 치수 재기부터 보정까지 테일러 기술의 모든 걸 담은 ‘맨스 모드의 길잡이- 테일러 기술의 실제’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이후 명동에서 자신의 매장을 갖게 된 문 고문은 세계적인 테일러가 되기 위해선 옷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겸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경영학과 행정학을 공부하는 등 남보다 앞선 준비와 노력을 한 것이다.

문 고문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복장협회 회장으로 있을 당시 이병철 제일모직 회장이 당시 거금인 10억 원을 지원해 서울 약수동에 5층 규모의 복장문화회관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7년에는 88올림픽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88올림픽 옷 잔치’ 패션쇼를 주관해 3만5천여 명의 관람객을 유치, 우리나라 섬유 산업이 발전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많은 패션쇼를 하고, 옷 바르게 입기 캠페인, 한국의 베스트 드레서 선정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메이드인코리아의 수준 높은 테일러 기술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의 작품은 현재 경복궁 민속박물관 ‘웨딩 100년사’ 전시관에 모닝코트와 턱시도가 소장돼 있다. 이는 자신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양복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문 고문은 대한민국명장회 ‘어르신’의 자리에 있다. 그래서 명장회와 명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크다. 20년전 명장회의 수장이 됐을 때 어떻게 명장회를 활성화 시키고, 명장의 권익과 위상을 높일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결과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데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 고문은 “현재 명장회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찰 정도로 뿌듯함을 느낀다”며 “이제는 명장회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뒷받침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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