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수의 한국인 이야기 8

천지인(天地人) 그 한국인의 정체성

혼돈(混沌)과 공허(空虛)

지난 호에서 약속했듯 이번에는 혼돈(混沌)과 공허(空虛)에 대해 이야기 해 본다.

혼돈(混沌)과 공허(空虛)는 하나씩 쌓아 십으로 커져야 한다는 천지인(天地人)의 대한정신에서 일적십거(一積十鉅)를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인 무(無)에 그 주석이 달려 있다. 물론 성경 창세기 1장 2절에도 그 땅의 상태로 기록되어져 있다.

 

무(無)에는 무(毋) 혼돈(混沌) 공허(空虛)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무(毋)란 금지사물위(禁止辭勿爲) 불(不)‘논리적인 말로 떠들기를 금하라, 없다 아니다’라는 것으로, 누구나 그저 “나 자신 하나만의 방식으로 자신은 살테니 남들은 내 일에 참견하지 말라”라는 의미를 가진다.

 

혼돈(混沌)이란 ‘섞다, 섞이다, 흐리다, 혼탁하다, 합하다, 맞추다’의 혼(混)에 ‘어둡다, 생성되지 못한 상태, 나누어지지 않은 모양, 어리석다, 우매한 모양, 빙 돌다’의 돈(沌)의 뜻이 섞여있다

이는 ‘무엇인 명확히 구분 됨이나 목적의 완성 없이 정신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빙 돌며 살아가는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가진다.

 

공허(空虛)란 ‘비다, 다하다, 없다, 모자라다, 내실없다, 근거 없다, 쓸쓸하다, 부질없이, 헛되다’의 공(空)과 ‘비다, 없다, 적다, 드물다, 모자라다, 준비가 없다, 욕심이 없다, 약하다, 비워두다, 틈’이라는 뜻을 가진 허(虛)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비어있는 공간이라는 물질적 개념 아닌 사람의 정신 상태에서의 공허란 자기를 위한 준비성도 안 따르고 늘 뭔가 비어있는 정신력으로 정체성이나 투지나 의지의 빈약함 때문에 갖게 되는 나약한 그 상태를 설명한다.

 

옥편에 달린 주석으로 보아 저 혼돈과 공허가 가시적 만물의 혼재와 텅 빈 하늘 이야기로 보이는가?

 

천손민족 대한의 정체성은 인성(人性)의 신성화(神性化)에서

 

대한정신의 기본은 자아성찰(自我省察)을 통한 반진일신(返眞一神)에 있다. 그런 진리의 일신에게로의 돌이킴은 성품 성(性) 자의 모양대로 마음이 성품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온전한 성(性)을 이룸은 자기의 생각 사상 의지 행동 기분 감정 등이 어우러진 삶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을 버리는 진정(眞精)을 이루고 그 악을 버리기 위한 반진일신(返眞一神)에 목숨을 거는 진명(眞命)을 이루므로 마음에서조차 악이 없이 선만 가득한 진성(眞性)에 도달한다는 삼진(三眞)의 법에 기초한다.

이는 배달의 경전 천부경(天符經)의 확장판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그 성품의 완전함을 위해 반진일신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반대적인 현상은 자아성찰(自我省察)을 앞세우는 반진일신(返眞一神)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보고 있는 시선이 자신의 마음 아닌 타인들의 언행에 있어 타인의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반응하는 상태이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심의성(心依性) 기의명(氣依命) 신의정(身依精)》... 이 말은 마음은 성품에 의지하고 기운은 목숨에 의지하며 능력은 가림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풀어쓰자면 사람이란 자기중심이라는 욕심을 바탕으로~~, 성품을 따라 마음이 움직이고 그 걸고 있는 목숨 따라 기운이 좌우되며 자기가 정한 선과 악의 구분 따라 그 능력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본성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감성적 인간이란 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를 위한 준비성에도 뇌가 안 따르고 늘 뭔가 비어있는 정신력으로 정체성이나 투지나 의지의 빈약함 때문에 갖게 일적십거(一積十鉅)하여 사람들 모두에게 하늘이라 인정받고 싶어 일(一)도 시작하지 않는 나약한 그 영적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살펴 진리의 일신에게로의 돌이켜 구하기 위해 ‘그 성품을 마음이 조절하고 그 목숨 걸 곳을 정하기 위해 기운을 발현하며 그 자신의 행위에서의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라’고 하는 천신(天神)의 요구(要求)를 모르는 채.

 

혼돈(混沌)과 공허(空虛)라는 무(無)에서의 해방은 우주적 현상이 마음에서 이뤄지는 것

 

인성(人性)이 신성(神性)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신(神)의 요구는 하늘에 있고 인간본연의 것은 성품에 있으며 그 성품에 있는 것을 하늘의 요구와 맞추기 위한 의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 이는 맨 위 ―은 하늘, 맨 아래 ―은 땅, 그리고 가운데 ―은 사람이라고 구분하는 三 으로의 구별이다.

그 하늘과 땅과 사람의 차이라는 위치의 구별이 없이 천지인(天地人)의 의식이 모두 다 땅 속에 있는 것을 무(無)의 상태라고 규정한 것이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다.

십거(十鉅)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적(一積)도 시작하지 못하는 혼돈(混沌)과 공허(空虛)와 무(毋)로서의 무(無)였던 것이 그 실행력 없는 나약함에 자기 본성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공자의 중용(中庸) 16장에 그 이야기가 있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에서 주인공인 “귀신은 보이지도 아니하고 소리도 없으나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을 바르게 하라하며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정갈히 하여 제사를 받들라고 요구 한다”라 하여 사람의 눈에 보이는 체용(體容)의 문제를 요구하는 귀신이 있음을 설명한다. 이는 성품을 요구하는 조물주(造物主)로서의 하늘(天)과는 그 요구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다음 구절에는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夫微之顯 誠之不可揜 如此夫라 하여 “신의 생각에 이르름에 있어 그 생각을 헤아리기 불가한데 하물며 생각을 깨기가 가하겠는가? 대저 숨겨진 그것이 드러남이니 가려 붙잡는 것이 불가한 정성이 이것이다”라 하여 신(神)의 요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숨겨진 비밀이라는 천명(天命)인 성품(性品)에 있음을 천명했다.

마음사용설명서라는 이름의 중용(中庸)이라는 대원칙을 앞세워 이 내용을 보자면 “천신(天神)이 바라는 성품(性)을 위한 삶 적인 마음이라는 천신(天神)의 요구도 따를 수 없는데 체용(體容)으로 나타나는 깨끗함을 바라는 귀신의 요구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으로 드러내야 할 신의 마음은 깨부수지 못한 한정된 인간의 정성 때문에 자신의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귀결 짓고 있다.

 

성경에도 창조(創造)를 시작하지 않은 혼돈(混沌)과 공허(空虛)라는 암흑(暗黑)상태가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創造)란 ‘바라’로 ‘먹여 키우다 도끼질을 하다’ 등으로 무엇인가는 잘라버리면서 새로운 모양을 만들기 위해 다듬고 키워가는 작업을 말한다. 마치 새로운 희망의 다양성이라는 풀 많을 추(萑)자를 허물기 위한 절구(臼) 위에 둔 옛 구(舊)에서 나무위에 올라서서 도끼질을 해대는 새로울 신(新)자로 이어지는 그 발전성처럼.

그 창조(創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설명하는 창세기 1장 2절이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분노)은 물의 얼굴에서 움직인다> 혼돈(混沌)은 자신을 밝혀줄 빛으로서의 윗물이 흙에서 분리되어 하늘로,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때를 따라 신이 채워줄 것을 믿고 내려놓아야 할 아랫물은 흙에서 분리되어 바다로 보내지 않은 상태이다.

또 공허(空虛)란 환란이라는 밤을 비추는 별과 달 그리고 평안이라는 낮을 비추는 해가 있어야 할 하늘에 아직은 없는 상태였다.

더하여 그 얼굴로 드러나는 물의 상태는 사악함이라는 어두움을 보여주고 있어 땅에 있어야 할 풀 채소 나무가 없다.

 

빛을 따르는 사상인 윗물과 밤과 낮을 따라 돌며 사람의 갈 길을 인도하는 해달별은 하늘에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탐심적 욕구라는 모든 요구는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뭍 아래 바다에 모아야 했다. 그리고 그 땅 아래 바다와 하늘이라는 물과 물 사이에 있는 땅에는 희망이라는 풀과 새로운 일의 시작이라는 채소와 모든 고통에서의 자아발견이라는 뜻을 가진 나무가 자라나서 씨들을 맺는 날까지 열매 맺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혼돈(混沌)과 공허(空虛)는 분별도 구별도 없는 무법천지

무(無)와 반대 되는 것이 유(有)라 한다. 대한의 사상으로 보자면 유(有)란 곧 수(數)로 생각의 헤아림이다. 일적십거(一積十鉅)로 발전하는 그 수(數)의 특성상 무(無)는 무엇인가를 목적을 위해 추구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상태는 남 위에 자기를 세우고 싶어 하는 역상심의 불(火)과 자기의 모자람이나 비난 등에 의한 두려움을 큰 소리로 상쇄시켜 자신을 높게 보이려는 벼락(震)을 가진 것이라고 대한민족의 경전은 설명한다.

 

그 불과 벼락의 핵심에는 항상 자신만은 원만한 사람이고 대인군자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있다. 그 자기합리화는 국가나 경전이 정한 법치적 윤리에 의한 것이 없다. 그 불과 벼락으로 살아가는 보편의 사람에겐 오직 자기가 정한 그 자기만의 원칙이 있을 뿐이다.

타인에 대한 요구는 그 행동으로 보며 100%의 선한행동을 요구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난에는 자기의 마음상태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서로 다른 두 기준을 바탕으로~~!

이는 기준이나 생각이 두 입을 가진 개라는 짐승 수(獸)자가 그 정체성을 설명한다.

짐승 같은, 짐승보다 더한, 짐승만도 못한~~

그런 표현의 일환으로.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무법천지라고 한다. 인륜이, 천륜이, 도덕이, 예절이, 서로 존중함(相敬)이, 배려가, 이해가, 포용이라는 인격적 인성마저 사라진 세상 말이다.

요즈음 뜨는 동영사 하나로, 전철에서 어느 젊은 쩍벌남에게 발 좀 치워 달라고 노인이 말하자 노인을 상대로 별 별 육두문자를 다 써가며 발광을 한 수원행 전철의 이야기에서부터 상속문제로 부모를 죽이는 등의 천륜파괴나 돈 문제, 성욕의 문제로 살인에 방화를 일으키는 등의 불법 탈법을 넘어 자기의 욕구만 해결해 달라고 불법시위 등으로 법을 조롱하는 자들의 뉴스가 판치는 티비 뉴스를 우리는 늘 대하고 산다.

 

그것이 특별법 등으로 해결 될까?

사건 해결을 위해 제정되는 법이란 소 잃고 외양간고치는 격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홍익인간을 위한 천지인(天地人)의 천부(天符) 정신을 국가가 교육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의 통치를 이루는 대한민국만이 답일 것이다.

 

다음호 9회 차에는 그 홍익인간을 위한 천부의 가르침과 역행 되는 귀신 즉 악마의 통치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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