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조총련 학교를 다니며 평양으로 소풍을 다니던 아이였다. 지금은 인천 모 지역에서 섹소폰을 불며 살고 있다. 

현재 두 형(이복)은 평양에서 대학교수로 있다. 그들은 과학자다.

그리고 누나 역시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독신이다. 평양에서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조총련계 은행인 '조운은행'에 입사해 평양으로 연수를 다녀온 것을 비롯해 수 십 차례 평양을 다녀 왔다. 

나는 평양을 갈 때마다 특급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조총련 막후 일인자였다. (내 아버지의 이름은 남한에서도, 특히 정보당국에서는 극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있었다)

86년 부친은 일본에서 사망했지만, 평양 국제교류문화회관에서 추도식을 할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 

내가 남한에 처음 온 것은 1987년 '상인대회'였다. 당시 나는 일본 세부야백화점에 한복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 당연히 남한 정보국에서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감시했다. 그야말로 첩보영화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결국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사상 검증을 받고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한 당국에서도 내가 사상보다는 민족애적인 활동이 왕성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어서 오히려 일본내 동포에 대한 도움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게 있다.  스포츠 국제경기대회가 있을 때 남북한단일팀이 구성되면 들고 나가는 '한반도기'는 내가 만든 것이다.

1982년 고베에서 세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있을 때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참가했는데 그 때 몇몇 일본 거주 젊은이들이 '다같은 동포이니 양쪽을 다 응원하자'라는 의견이 나왔다. 바로 '통일응원단'이었다.

그런데 태극기와 인공기를 들고 가면 어느 한 쪽에서는 반감을 가질 것이니 양측 다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상징 깃발을 만들자는 것에 착안해 탄생한 것이 바로 '한반도기'다.

나는 96년 7월 '부산바다축제'가 열릴 때 길옥윤 선생 친동생의 권유로 행사 PD를 맡으면서 남한 정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나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요즘 남북관계가 어떻게 발전할 것 같으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 

글쎄다.

 - 2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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