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정말 풍수상,불길할까-끝나지 않는 논쟁
청와대는 정말 풍수상,불길할까-끝나지 않는 논쟁
  • 서진석
  • 승인 2019.04.1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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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잇딴 비극...조선시대 후궁 거처해 한(恨) 서려 흉지"

 

청와대는 정말 풍수상,불길할까-끝나지 않는 논쟁

필자 전재혁
         

 

"역대 대통령 잇딴 비극...조선시대 후궁 거처해 한(恨) 서려 흉지"
"천하제일복지 표석 발견...고려시대 왕의 임시거처로 길지" 반론도
"풍수 논하기 전에 서울-세종 행정 비효율부터 줄여야"

 

해마다 명절 연휴가 끝날 때쯤이면 광화문, 삼청동 일대는 서울로 역귀성한 사람들, 명절 인사를 끝내고 막바지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광화문, 삼청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청와대이지요. 북악산 밑, 경복궁 뒤에 고고하게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권력자의 집무실이자 관저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청와대의 터가 풍수상 좋지 않다는 말이 있는 것은 알고 계셨나요. 청와대를 둘러싼 ‘풍수 말말말’ 풍수 논쟁을 정리해 봤습니다.  
◇文대통령 측근의 돌출 발언 “청와대가 풍수상 좋지 않다”=최근 청와대의 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시대 위원회 자문위원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광화문으로의 집무실 이전이 현실적인 이유로 어렵다는 내용을 발표하며 “현재 대통령 관저가 풍수상 불길해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무엇인가’는 질문에 “수많은 근거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유 위원은 문 대통령과 가까워 문 대통령에게 청와대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고 합니다.  

많은 풍수가들 사이에서 청와대의 터가 좋지 않다는 말이 많습니다. 시작은 1990년대 초반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는 저서 등에서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과 청와대 정문 사이에 난 도로를 경계선으로 청와대가 있는 북쪽은 신령의 강림지이고 경복궁이 있는 남쪽은 사람들의 거주처”라며 청와대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풍수 전문가들은 청와대 뒤의 북악산이 바위가 많아 살기(殺氣)가 강하며 이를 청와대가 온몸으로 맞고 있어 좋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실제 북악산을 보면 곳곳에 바위가 돌출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조선시대 소외된 후궁들의 거처가 있던 곳으로 ‘한(恨)’이 서려 있고 일제도 1939년 청와대 터에 조선 총독이 머무는 관저를 지었다가 6년 뒤 패망한 것도 근거로 제시합니다. 전향수 한국풍수지리연구원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의 말로가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 실증 증거”라며 “일제강점기에 임시로 지어진 조선 총독 관저 자리에 풍수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청와대를 지었다. 종로구 정독도서관 위치가 길지”라고 말했습니다.

◇고려왕조 때 왕이 머무는 거처...“흉지 아니다” 반론도=하지만 반론도 많습니다. 역대 대통령의 비극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란 주장입니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9년 청와대를 신축하며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라는 뜻의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祉)’라고 쓰인 표석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조선 중기인 300~4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풍수지리를 중시한 고려왕조 때 왕이 임시로 머무는 이궁(離宮)을 현재의 청와대 터에 세웠으므로 길지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풍수에 각별한 관심이 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언론사 간담회에서 ‘청와대는 흉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청와대 터는 왕 터다. 정말 좋은 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화기(火氣)가 있다 해서 청계천을 파 물을 들이고 해태를 설치했다고 한다”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시는 어떨까요. 배산임수의 전통적인 명당 기준은 만족합니다. 뒤로는 원수산, 앞으로는 금강이 있는 것이지요. 전 원장은 “정부청사가 들어선 곳은 북악산과 달리 풍수적으로 정돈이 잘된 원수산 밑이어서 명당”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주산(원수산)과 좌청룡(전월산)은 있지만 우백호가 약하고 안산이 없는 것은 흠으로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풍수 논하기 전에 세종시-서울 행정 비효율 해결해야=풍수에 대한 설들의 진위를 가리기 전에 효율적인 국가행정을 위해 변화가 절실하다는 게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청와대·정부서울청사·국회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세종시입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정부 내 소통 및 협업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국장, 과장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다보니 사무관들을 붙잡고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 없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도 “업무에 집중할 수도 없고 후배 사무관들 능력 향상에도 심각한 차질이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세종에 거주하는 공무원들은 과천 때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10분의1로 줄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대책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은 백악관과 행정부·의회가 워싱턴DC에 집결돼 있고 영국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는 총리 관저 옆에 재무장관 집무실이 연결돼 있어 수시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청와대의 위치도 문제입니다. 백악관은 대로변에 있어 시민이 창살 사이로 백악관 내를 오가는 대통령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위치해 있어 대통령이 날 것의 민심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청와대에 ‘구중궁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며 청와대만 들어가면 멀쩡하던 사람도 ‘불통’으로 변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근거입니다. 김대중·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 후보들은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공약했지만 경호 등의 현실적인 이유로 모두 흐지부지됐고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 결과를 냈습니다.   

 

제1차 왕자의난 최대 피해자 정도전은 고위관료이면서, 풍수지리학자인 동시에,반영능력자였다. 조선 건국 당시 그가 행한 행적으로 보면 가연 사람인지,신인지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1392년(고려 공양왕4년)7월,정도전(1342년'출생'~1398년'사망')은 태조 이성계(1335년'출생'~1408년'사망')를 초대왕으로 추대,조선왕조를 건국했다.당시 정도전 나이 50세였다.조선왕조 건국1등공신 가운데 제일 실세로서 문관직은 물론 무관직도 같이 맡으면서 단연 막강한 2인자 자리를 굳혔다.1394년10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시기 정도전은 도성이 들어설 자리로 현재 사대문안을 정했고,한양 도성안 5부49방, 현대용어 표현시,구와,동 이름에 국한되지 않고 경복궁,사정전,근정전등 궁과 누각,숭례문,흥인문,돈의문,숙청문까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그러나 그런 그도 실수한 게 있었는데,다름아닌,경복궁터였다. 지금까지도 뭐 때문에 정도전이 북악산 자락을 구태여 고집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그 당시 태조 이성계 왕사였던 승려'무학(1327년'출생'~1405년'사망')'판단은 달랐다.무학 시각상에는 인왕산 자락이 새 궁터의 최적임지였다. 
  
"인왕산(仁王山)아래 궁궐을 낙산을 바라보게 짓는다면 인왕산이 주산이 되고,북악산(北嶽山)용맥이 연결되는 좌청룡(左靑龍)과 오른쪽으로는 남산(南山)연결되는 우백호(右白虎)가 갖춰지게 되므로 새왕조는 그야말로 태평천하(太平天下)를 얻게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조선 건국(개국)당시,무학대사는 한양의 주산을 인앙산으로 삼으려고 했지만,당대 실세 이방원,정도전 의해 좌절된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경복궁의 좌향을 남향으로 잡아 세운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산수비기(山水秘記)'통해 예언했다. 
  
"도읍을 택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연존(延存)의 바람이 있을 것이지만,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하면 150년이 지나기 전에 찬탈의 화가 일어날 것이요,겨우 200년 내외에 판탕(板蕩)의난(亂)함에 이를 것이니 잘 생각하라."물론 '승려'는 무학,'정씨 성 가진 사람'은 정도전이다.'] 
  
차손(次孫)이 장손(長孫)을 꺾고 누르며 제압할 것을 걱정하고,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동양으로 새왕조의 궁궐을 세워 앉히면 북악산이 좌청룡, 남산이 우백호가 되어 장손이 흥왕(興旺)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런 반면,건국1등공신 정도전 생각은 달랐다.궁궐터 자체는 무학 추천지와 별다른 큰 차이가 없었다.그러나 궁의 주산이 달랐다.인왕산이 아닌,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자좌,즉 남향으로 궁궐터를 잡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대권욕(권좌욕)에 불타는 실세왕자 이방원(1367년'출생'~1422년'사망')은 차손이 발전,흥왕하는 좌향을 선택하고 싶어했다.눈치 빠른 정도전은 '예기'를 들어 남향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예기'는 '천자당의이립 제휴북면견천자((天子當依而立 諸侯北面天子)'라고 적고 있다. 즉,임금이 병풍을 치고 그 앞에 서면 제후는 북을 향해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도리에 일치하고 마땅하다는 의미다.결국 기세등등한 건국1등공신 실세 정도전 의견이 태조'이성계', 이방원 '내면구미'일치, 맞아떨어져 경복궁의 좌향은 차손이 흥왕하는 남향으로 결정내려졌는데 북악산을 주산으로 임좌병향(壬座丙向),즉 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바라보게끔 터를 잡아세웠다.그러나 경복궁의 좌향을 남향으로 잡아 세우도록 결정내린 건 불행의 시작이었다.승려'무학'은 안타까웠다. 
  
"궁궐을 자좌(子坐)로 지어 세우면 5대가 가기 전 혁명이 일어나고,200년 못가 나라가 흔들릴 난리가 일어난다."라고 태조'이성계'에게 호소했지만,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1453년(단종1)]등 피비린내 변고가 끊이지 않았고,왕조건국 200년째 1592년에는 임진왜란[(조선 1592(선조 25년)부터 1598(선조 31년)]터졌다.건국1등공신 실세 정도전은 승려'무학'만 견해만 무시하고 누른게 아니다.조선왕조 건국 800년 전 이미 신라 의상대사 의해 '산수비기(山水秘記)'통해 예언되었던 것이다. 
  
"도읍을 택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연존(延存)의 바람이 있을 것이지만,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하면 150년이 지나기 전에 찬탈의 화가 일어날 것이요,겨우 200년 내외에 판탕(板蕩)의난(亂)함에 이를 것이니 잘 생각하라."물론 '승려'는 무학,'정씨 성 가진 사람'은 정도전이다. 
  
무학을 이기고 누르면서까지  자신의 뜻대로 경복궁을 세운 정도전. 그에겐 치명적 과거가 있었는데, 자심에게 친히 맹자(孟子)책을 건네준 스승이면서 부모 같았던 포은 정몽주를 이방원 부하가 격살시킨 것이었다. 그 당시, 이방원 배후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결국(재표현시),정도전이 정몽주를 죽인 것이나 진배없었고,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지만,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 의해 살해된다. 사제지간이었던 양정(兩鄭)씨가 이방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된 것이었다. 
  
역대 조선왕조 518년 역사 27대 왕들 가운데 장자(장손)로서,보위를 계승한 임금은 9명불과했다. 그것도 그나마 치적을 빛내거나 장수한 왕이 드물었다.병약,단명,후사없이 승하한 왕들이 대부분였다.  
  
섭생만 놓고 보면,예외(열외)없이 무병장수해야 마땅할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7세 불과했다.경복궁,즉 청와대터 줗지않은'불길'기운이 작용한 요절이었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숙부 세조(수양대군)는 52세로 승하시까지 기울증(우울증)에 시달렸다. 심리요소 의한 비중이 큰 병이었던 만큼 무당, 등 술자의 축문 독경, 무의식, 기도, 부적등이 동원됐다. 물론 그 어떤 유형 수단도 경복궁 땅'불길'기운을 누르지는 못했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 가운데 최장수자는 영조였다. 83세로 승하했다. 그러나 영조는 재임(즉위)기간,경복궁에서 살지 않았다. 영조는 창덕궁에서 태어나 경희궁에서 영면했다.즉위기간내에는 창덕궁과 창경궁,그리고 경희궁을 오가면서 지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영조는 경복궁의 흉한'불길'기운을 피할 수 있었다. 태생유전인자도 건강하고 좋았다. 무수리 출신 영조의 모친은 튼튼했다. 영조는 어머니의 건강체질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경종(숙종과 장희빈 아들)의 동생이었던 영조는 경종 즉위18세 때부터 궁궐 밖에서 백성들과 어울리며 검소하게 살았다. 밥도 잡곡밥을 좀더 좋아했다. 저녁식은 거르지 않았고,주색에도 경계가 있었다. 경복궁에서 벗어나 창덕궁에서 살았기에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조선왕조가 건국518년만에 27대 역대왕들을 끝으로,일본제국주의 의해 합병(국권피탈)당한 이후에도 역대 조선총독 8명 역시 경북궁터 흉한'불길'기운에서 벗어나고 탈피 할 수 없어서 예외없이 끝이 좋지 않았다.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3대/5대 사이토 마코토 총독, 4대 야마나시 한조 총독, 6대 오가키 가즈시게 총독, 7대 미나마 지로 총독, 8대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 마지막 아베 노부유키 총독 이르기까지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모두 '비명황사'했다. 
  
수명이 한계 도달해야만 죽는 게 아니다. 삶아 죽인다는 팽형도 실제로는 불명예형이다. 물을 담은 무쇠솥에 죄인을 넣고 솥뚜껑을 닫는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시늉만으로 집행을 끝낸다. 그러나 팽형 당한 자는 수명 종결시까지 자사상태로 구차삶을 보내야 한다. 숨을 쉬지만(호흡은 하지만)시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8/15국권회복(해방)이후,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 불미스런 임기말년 및 '대국민퇴임'이후에도 끝이 비극적이었다. 
  
민심이반 의한 해외망명(이승만),후임자 압력/영향 의한 정권인계(윤보선),최측근 의한 시해(박정희),후임자 압력/입김 의한 자진하야(최규하),후임자 의한 교도소 수감(전두환,노태우),자식들 비리 의한 대국민사과 발표(김영삼,김대중),임기내 비리 따른 검찰수사 의한 의문사(노무현),퇴임후 친/인척 비리(이명박)등이다.  
  
풍수가들은 서울시 최고 명당을 '경복궁'과'창덕궁'으로  선택하는데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경복궁 200년, 창덕궁 300년 왕기는 명당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반면 청와대 경우 어떤가. 1926년 현재 청와대터에 조선총독관저를 세운지 겨우 90년이 지났건만,'이전설' 분분하고,심상치 않다. 청와대 주인들을 말로가 한결같이 좋지 못했던/않았던영향이다. 
  
청와대 주산은 북악산이다. 조선 건국 직후 수도가 한양으로 ㅈ벙해지자 개국공신 정도전은 북악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삼았다. 무학대사의 혜안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지목했는데,'혁명세력(실세)'의지를 꺾은 철인(鐵人)은 자고로 없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잠시 태평성댁 지속되는가 싶었다 하면 어느새 폭군이 등장하고, '맏아들(장손:長孫)이 왕위를 세습한다' 원칙이 이행된 유형은 선조와 정조외 없었으며, 살 만하면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돼는 조선의 불행을 원천 차단하는 비결을 알면서도 겪고 당한 셈 되었다. 
  
'왕산이 주산이 되면 좌청룡 북악산, 우백호 남산을 거느린 궁궐(경복궁)은 자연스럽게 동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관악산이 내뿜는 불기운도 막아냈을 것이며, 훗날 대원군이 광화문에 '해태'상이라는 방화문을 세웠을 만큼  관악산 화기(火氣)는 드세다. 
  
북한산의 세력권 북악산 앞마당 경복궁과 청와대는 터가 대단히 불길하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영향 때문에 조선개국/건국=>태조-정조-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강화조 조약/을사늑약/네덜란드 헤이그 밀사=>강제퇴위)-순종(경술국치/국권피탈)-이토-히로부미(을사늑약 전후/한일병합 이전)-일제군국 식민주의 시대=>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 正毅)-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야마나시 한조(山梨 半造)-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미나미 지로(南 次郎)-고이소 구니아키(小磯 國昭)-아베 노부유키(阿部 信行)=>8.15국권회복/남북 대립&분단시대=>北韓-김일성-김정일-김정은/大韓民國-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고건-노무현-이명박-박근혜-황교안-문재인順序이어져 내려왔고 역대 조선왕조,일제시대 조선총독,남북분단이후 역대 북반부 최고통지차들 및 남반무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末路관련 바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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