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닮은 그림 속에서 時의 유희를 만끽하다

    

귀엽고 예쁘다. 그리고 순수함이 물씬 느껴진다. 인생에서 가장 맑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김희연 작가의 작품은 어른인 듯 어린이고, 어린이인 듯 어른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구상자연주의를 벗어나 심의(心意)적 자연주의를 모색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김 작가도 마찬가지다. 장르로 치면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이 분명하지만 그는 대상을 모사하지 않는다. 그는 도식적 정물이나 풍경을 그리지 않는다. 물론 자연 대상에서 일차적 모티브를 얻는 건 사실이지만 화면에 그려져 나오는 것은 그가 독창적으로 변형 해낸 모습들이다.

그만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각, 느낌, 관조들이 서정성을 깃들여 화면에 꾸며진다. 그의 필(feel)은 어느 정도 무심(無心)필이다. 계획적이기보다는 그때그때, 마음 따라 운필(運筆)의 묘미를 발휘한다. 그래서 화면은 유연하고 자유스럽다.

물 흐르듯이, 때론 소리없이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유로운 언어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원색보다는 스스로 배합한 중간색을 통하여 대상의 본령을 유추해낸다. 그 색의 옷을 입은 대상들은 은근하게 자기를 발언(發言)한다.

대상과 선과 색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감미롭고 부드러운 실내악처럼 눈가에 젖는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면서도 서로가 잘 친화되는 화면이 그의 능력을 증거 해주고 있다. 이런 조형들은 자칫 산만해지거나 주제가 모호해질 수 있는데 김희연 작가는 숙련된 기교로 그런 위험을 불식해내고 있다. 그의 자연은 웅장하지 않다.

일부러 깊고 유연한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것들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나 나무다. 말하자면 소소한 자연이다. 그러나 평범하거나 작다고 아무 뜻이 없는 것이 아니다. 높은 산을 이루는 것도 그 소소한 자연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풀잎 하나, 꽃잎 하나에도 생명의 뜻이 있다. 작은 생명도 다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그의 조형적 의상은 그런 것들을 바라보고 속으로 갈무리하는 것이다. 다시 그것들은 그의 내면에서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몽유(夢遊)의 화면이 된다. 그러므로 그 대상들은 단순한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움이기도 하고, 기다림이기도 하고, 기쁨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때론 외로움의 대사이며 적막한 시간의 위안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한 편의 시라고 느껴진다. 그는 작품마다 화제처럼 시를 썼다. 논평보다 그 시들이 더 진솔하다. 그 시를 읽으면 그의 그림을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림이 그렇듯이 그의 시도 다분히 이상적이다.

일상에서 쓰는 언어들과 생각들이 형상성을 띠고 있다면 혼자만의 내면적 언어들은 추상의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처럼 그의 시어도 마찬가지다. 일차원적인 언어와 삼차원적인 언어가 묘하게 조합되면서 감성의 호소력을 깊게 한다.

그의 조형은 이성적이기 보다 감성적이다. 자연주의가 본래 감성을 바탕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그녀의 것은 좀 더 깊고 세심하다. 언뜻 보면 큰 울림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서서히 젖어드는 것이 그 작품의 특색이다.

그의 화면에선 꿈의 노랫말을 보게 된다. 연륜과는 상관없는, 순수하도록 맑은 노래들이다. 그가 홀로 사유(思惟)하는 시간엔 혼자 그 꿈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유와 사념(思念)을 그는 무위의 손으로 그리고 있다. 자연은 그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도구일 뿐이다. 근작(近作)에 이르러서 대상들이 더 흩어지고, 추상표현의 점유가 더 많아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식물적인 이미지들은 이러한 시간성에 의한 피고 지는 생성과 소멸의 은유(隱喩)적인 한 형태로서 자신의 작업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소재로 재창조 되었다.

김희연 작가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선(線)적인 운동감과 간결한 드로잉적인 이미지는 중성적인 색채감과 더불어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하여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연유된 것으로 자유롭게 선을 긋거나 화면에 물감을 얹는 것은 시(時) 공간을 초월한 일직선상의 감정의 몰입을 화면속에 쏟아 붓는 유희적인 입장에서 자연은 새로운 언어로 화면을 재탄생 시킨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반추(反芻)하고 또 반추한다. 작가로서 아주 좋은 자세다. 어떤 작가도 자기의 작품은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기준이나 법칙은 없다.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것을 자신만이 그린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현대미술이라는 모호한 개념의 조형이 득세하고, 그것이 마치 진짜 미술인 것처럼 호도된다 해도 진정한 작가는 그런 것에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예술의 진가는 독창성에 있다. 모티브를 찾고 거기에 독창성을 주입하면 자신만의 훌륭한 조형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김희연 작가의 조형은 누구도 보여주지 못하는 그만의 언어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사유, 그의 시각, 그의 성찰(省察)의 산물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갖지 못한 강점이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이 있다. 시와 그림은 하나라는 뜻이다.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면, 시를 쓰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일이다. 그 둘의 에스프리가 하나로 조화되어 나오는 그녀의 작업을 기대해도 좋다.

유년의 바다

김희연

맑고 찬 구름은

풀잎 고운 하늘의 갈피마다

환한 웃음으로 햇살을 쏟아내고

그리움이 머물다 간

설레임의 응시는

무성했던 지난여름

푸르른 입자의 추억조차

일렁이는 바다의 울음으로 밀려가고

낮게 질주하던

풋풋한 순수의 열정

바람에 실려 속삭이듯 해변을 거닌다.

가을연가

김희연

축제의 한 소절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 여운이면

주인공의 뒷모습처럼 고독하다

무성했던 그날의 연기이면

한잔의 와인으로 나를 가두는

반쯤 끝나버린 축제의 아쉬움이면

눈 시리도록 쳐다 본 창 밖

다시금 마지막 열정의 길 위를 흔들고 있는

지금껏 사랑은 그리움의 끝이었으면

빗물처럼 가슴으로 흐르는 눈물이었으면

이 적적한 어둠의 가을을 지탱하여

스스로 안식의 잠을 청할 수 있는

한 자락 가을 소리는 오늘따라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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