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숙 대한민국명장

대한민국 ‘뷰티 트렌드’ 선도로 세계 최고 수준 등극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업은 타인(他人)을 가장 아름답게 꾸며주는 능력이 아닐까. 아마도 남을 예쁘게 가꿔주려면 자신이 먼저 맑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다.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헤어꼬뽈라. 상호 앞에 김교숙(金蕎淑)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대한민국 미용부문 명장(名匠)이다. 2015년 명장에 선정된 김 명장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미용계의 역사이자 전설이다.

김 명장은 당시 훈장이었던 외조부의 권유로 ‘미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62년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55년 동안을 ‘뷰티 크리에이터’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 명장의 첫 인상은 ‘아름다움’을 품은 ‘우아함’이었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가꿔지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게 김 명장의 지론(持論)이다.

김 명장이 대한민국 미용 수준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미용업계 관계자들은 김 명장의 그동안의 업적에 대해 경의(敬意) 표할 것이다.

김 명장은 뷰티 트렌드를 선도했다. 기존의 스타일을 개선함하고 세계 유행 스타일을 도입함은 물론, 자신만의 ‘창조적 작품’을 무수히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미용 관련 언론매체를 통해 전국으로 파급됐으며 미용 선진국에서도 모방할 정도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미인대회 단골 스타일리스트…국내 유명 연예인 다수 배출

그는 또 ‘미인대회’ 단골 스타일리스트로도 정평이 나 있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물론 각지의 미인대회 출전자들은 김 명장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의 손을 거쳐 입상자가 된 ‘미인’은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고, 현재 우리나라 연예계 탑 스타들도 즐비하다.

김 명장이 칭송을 받는 것은 솜씨의 탁월함만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에게 전달해 주려는 노력이 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기술과 지식, 그리고 센스는 그 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김 명장은 “어느 분야든지 몇몇 사람만 잘 한다고 그 분야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기술을 꽁꽁 숨기면 결국 그 기술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남과 공유하고 소통할 때 발전이 있는 것이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 명장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강의 요청이 있으면 자비(自費)를 들여서라도 기꺼이 출동(?)한다. 이렇게 다는 횟수가 거의 2000번 정도 될 것이다. 아마 국내 미용업계에서 김 명장의 세미나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미용사가 없다고 할 정도란다.

김 명장은 그 동안 쌓은 기술에만 멈추어 안주(安住)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기 위한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특허 3건, 디자인 등록 10건 등 미용산업 발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대회 출전하며 고급 기법 익혀 국내 보급

김 명장의 ‘작품’중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화려한 ‘업스타일’이다. 현재도 미용계를 대표하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고, 이 업스타일은 단순한 미용 기술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놨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김 명장의 실력은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이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수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면서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최고의 기술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고 대회를 준비하면서 반복된 연습과 시행착오가 오기와 끈기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명장이 국제대회에 왕성하게 출전할 때는 70~80년대. 미국이나 유럽에 나가 대회를 치르면 서러움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에게 한국은 매우 생소한 나라였다. 여기에 동양인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 속에서의 경쟁은 이중고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 명장은 이러한 분위기에 기죽지 않고 ‘반드시 대한민국의 우수한 미용 수준을 세계에 알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놓겠다’는 의지로 당당히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후진양성위해 전국 누비며 강연…사회공헌 활동도 왕성

김 명장은 82년 CACF(프랑스미용예술인협회) 한국 국가대표, 84년 이탈리아 헤어월드 국가대표 등 80년대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국위 선양에 앞장섰고 그의 업적은 지금도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김 명장을 후배양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한다. 그래서 전국 각지를 돌며 기술을 전수하고 새로운 지식을 나누며 우리나라 미용 발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김 명장은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 줬다. “80년대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지방 세미나를 가는 게 다반사(茶飯事)였다. 어느 날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 나 3시간 정도 늦게 되었는데 세미나 장소에 도착해 보면 참석자들이 노래자랑을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그들의 일념이 떠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날의 감동을 생각하면 지금이 마음이 뭉클하다.”

김 명장은 ‘명장’이 된 후 후진양성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미용을 전공하는 고등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현업에 있는 미용사를 초청해 새로운 트렌드와 테크닉을 교육하고 있다.

또한 명장의 역할 중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김 명장은 “대한민국 명장이 된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자 자랑”이라며 “하지만 명장으로서의 자부심을 넘어 묵직한 책임감도 무시할 수 없다”말했다.

명장은 자신의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산업발전은 물론 후진양성에도 큰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김 명장은 미용 명장답게 관련 봉사는 기본이고 지역사회 불우이웃을 위한 다양한 기부에도 열성이다.

김 명장은 “명장은 국가에서 인정한 최고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기술 개발은 후진양성에 이바지해야함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도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교숙 명장의 국제 활동>

1982 파리 CACF 국제미용페스티벌 1위

1982.9 INAC(이낙) 프랑스 국립미용학교 수료

영국 런던 비달사순 커트스쿨 수료

1983~98 김교숙 개인 헤어작품발표회 30회

1981 미국 라스베이거스 월드 챔피언십 이브닝 세팅 스타일 1위

1986 이탈리아 베르나 월드 챔피언십 국가대표 참가

1988 CACF 선수 선발대회 심사위원장

1989 파리 국립학교 이낙스쿨 수료

1990 네덜란드 월드 챔피언십 트레이너

1990~92 프랑스 MCB대회 심사위원

1992~96 뉴욕 IBS 심사위원 및 트레이너

김교숙 대한민국명장
김교숙 대한민국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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