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工藝는 우리 민족의 숨결 스며있는 一心同體

 

중국 둥베이(東北)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古墳) 무용총(舞踊塚)은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고분은 벽면에 그려진 수렵도(狩獵圖)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벽화 한 작품이 있다. 천장고임부에 그려져 있는 평상에 앉은 인물 그림이다. 무용총 벽화에는 생활풍속 장면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으며 평상뿐만 아니라 음식상, 수레 등의 목공예품(木工藝品)도 발견됐다.

이렇듯 우리 민족과 목공예와의 관계는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이어져 왔다. 목공예는 나무를 이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기예(技藝) 및 그 제품을 총칭한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각종 건물과 가재도구의 대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사용했다.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이나 관아·사원 같은 공공건물을 비롯하여 모든 사사로운 주택이 목조건물이므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의 대부분은 목제품이었다.

대한민국 명장 직종 중에는 ‘공예’ 분야가 있으며 중심이 되는 것이 ‘목공예’다. 명장들의 목공예품은 일반 시장에 나와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가격이 만만치는 않지만 그 가치는 금액으로 따지기에는 큰 ‘결례’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생활과 목공예품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어져 내려 왔을까.

우리나라는 나무를 많이 다루는 생활여건에 따라 갖가지 민구(民具) 역시 나무로 제작해 사용하는 게 많았다. 따라서 목재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일반적으로 공장(工匠)을 ‘성녕바치’라 일컬었음에 반하여 목수(木手)의 경우 도리어 ‘지위’라는 존칭어로 불러 왔다. ‘고려사’를 보면 ‘바치’에 해당하는 ‘장(匠)’이라는 용어 대신 ‘목업(木業)’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목척(木尺)’ 또는 ‘자인(梓人)’이라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나무 다루는 기술자는 사회의 요직으로 重用

‘산림경제’에 따르면 일반가정에서 갖추어 놓아야 할 생활용품 가운데 목죽제품의 비율이 도자기와 금속제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체 목록의 40%를 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목재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거공간이 석조나 벽돌건물인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목조건물에다 온돌을 발달시킨 평좌식(平坐式) 생활을 해왔으므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의 가구는 아담하고 따사로운 주거의 분위기에 맞도록 단순화시켜 절제된 소박한 느낌을 준다. 또한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가구는 한 시대의 유행이거나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풍토의 제약으로 인하여 목재로 활용되는 수종(樹種)은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소나무는 건축목재로서 적당하지 않다. 느티나무·느릅나무·들메나무·포구나무 등은 무늬 좋은 목재로, 가래나무·은행나무·오동나무·피나무 등은 판재로, 참죽나무·물푸레나무·버드나무 등은 야물고 질긴 목재로, 먹감나무·배나무·박달나무 등은 특수용재로 사용된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전나무·분비나무·이깔나무 등이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나 근세에는 희귀 수종이 되었고, 화류·흑단·침향목 등은 삼국시대부터 엄격히 규제된 수입 목재였다. 일본에 흔한 가구재(家具材)도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 많다. 따라서 각기 자기 고장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목공예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목공품은 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못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숨겨진 내부의 결구(結構)를 튼튼하게 짜는 데 특징이 있는데 대나무 못과 부레풀을 주로 썼다. 그것은 나무의 성질을 이치에 맞게 적용하는 오랜 경험의 결과이다. 목공품은 그 쓰임새와 놓이는 장소에 따라 가변성(可變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숨 쉬는 기물에 속하며, 제작자의 재능과 사용자의 애정이 동시에 민감하게 반영된다는 점에서 공예품으로서의 품격을 지닌다. 그것은 또한 목공품의 외장 방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목공예는 거의 자료가 없어 살펴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것을 통하여 비로소 접근이 가능해진다. 낙랑고분의 유물을 통하여 고구려의 목공예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며,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풍속적인 내용이 많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수레와 평상(平床) 등의 목제품을 엿볼 수 있다.

안악(安岳) 제3호분과 쌍영총·무용총 등에서는 수레의 모양이 다양하게 보이고, 그 밖에 덕흥리(德興里)고분과 감신총(龕神塚)·매산리사신총 등에서 나지막한 평상이 보인다. 이는 고구려의 왕이나 귀인들이 평소 사용하였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제가구는 무용총과 각저총(角抵塚)에 보이는 음식상이다. 비록 간략하게 선묘한 데 불과하나 훌쭉하게 긴 뻗정다리에다 사방에서 떠받치듯 네 다리를 벌려 안정감을 꾀하였고, 발목을 말발굽모양으로 바깥 마족상(馬足床)으로 하였는데, 주인과 손님이 걸상에 마주앉은 것으로 보아 입식(立式) 생활양식임을 알 수 있다.

백제 초기의 석촌동(石村洞)고분에서는 대형의 원형칠기가 출토되었고, 경상남도 김해의 다호리 가야고분에서는 옻칠한 고족(高足)의 사각접시가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서기를 전후한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서 벽화고분이 형성될 무렵에는 목기가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경주적석고분에서 적잖은 목칠기가 발견되었는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도 여러 가지 용기로서의 칠기가 발견됐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주목되는 다른 하나의 유물은 목칠관(木漆棺)이다. 특히,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옻칠한 위에다 금 조각을 붙여 무늬를 놓은 것, 또 연단(鉛丹)을 씌운 위에 먹과 백분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두침(頭枕)과 족좌(足坐), 금박까지 입힌 봉두식(鳳頭飾) 등은 당시의 호사스런 장제(葬制)를 실증해 주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선보인 나무구슬 꾸러미는 독특하고 진귀한 목공예품이다. 동글납작한 나무판에 금테를 메워 줄줄이 연결하고 수형패식(獸形佩飾)까지 부착하여 목걸이를 연상시키는 것과 이미 변색은 심하나 본래 목질이 목석처럼 단단하고 윤기나는 재질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추모양의 나무 구슬을 꿴 것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는 사회의 요직에서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당시의 목수는 비록 말단에 불과할지라도 관직의 서열에 올라 있었음을 보게 된다. 물론, 목공기술이 지배계급의 위계에 낄 수는 없었겠지만, 해당 분야의 원로 기술자 내지 실무 감독직으로서 대우받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도성의 도시행정을 관장하는 전읍서(典邑署)에 사(史) 16인과 목척 70인을 둔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목척이란 곧 대목을 가리키는데 그들에 의하여 국가적인 조영 업무가 수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크게 만든 고리는 의복 수장구로 널리 쓰였고 그것이 바로 농(籠)의 구실을 했다. 버들가지를 다루는 솜씨는 오늘날 키를 만드는 기능으로만 명맥을 이어 올 따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목칠공예가 발달됨에 따라 귀족계층의 식기는 여러 형태의 칠기로 압축된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그릇들은 소형에 속하며 호비칼로 깎아 다듬었고 한결 같이 나무(木心)에다 직접 칠을 입혔다. 반면에, 안압지 출토품은 몇 가지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즉, 이 시대는 동력화한 갈이틀(鏃機)이 보급되어 있었으나 더욱 복잡한 공정으로 견실한 제품을 만드는 데 정성을 다했다.

그 한가지 방법은 대접모양의 칠기를 만들 때 전나무를 마름모꼴의 줄기처럼 짜개고 다듬어서 틀어올리는 성형기법(成形技法)이요, 다른 하나는 기벽(器壁)을 수직으로 세워 찬합모양으로 만들 때 기벽을 두껍게 성형하기 위하여 나무를 종잇장처럼 떠내어 여러 번 겹겹이 바르는 기법이다.

어느 경우에나 기벽과 바닥의 접착 부위에는 가는 나무올을 몇 바퀴 더 돌려 붙여서 보강하였고 안팎으로 삼베를 바른 위에 옻칠을 하였다. 이와 같은 목심성형법은 그릇이 갈라지거나 깨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 주며, 병모양이나 합모양으로 꾸미는 데 가장 효율적인 시공법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목공예는 출토품이 없고 사서(史書)의 기록 또한 단편적이다. 다만, 전세품(傳世品)으로 유존하는 나전칠기가 10여 점 있어서 목공품의 외장기법을 엿볼 수 있고, 팔만대장경의 조판(雕板)을 통하여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관영 수공업소에서 만드는 제품은 오직 왕실과 귀족 같은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생산조직 속에서 우수한 목공예품일수록 공가(公家)의 소유로 되었으며 장인들은 점차 봉건적 신분규제에 얽매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좋은 공예품을 향유하는 또 하나의 특권층은 사찰이요, 승려였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나전칠기가 경함(經函)·염주합(念珠盒)·불자(拂子) 등을 비롯하여 범종·금구·향로·사리구 등 불교문화재로 집약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고려 하대에는 유기의 사용이 재물의 낭비가 됨을 지적하면서 오로지 자기(磁器)와 목기(木器)를 써서 습속을 고치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재래의 평좌식 생활방식에 따른 가구의 절충식 이용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는 가운데 토착화 과정이 빠르게 이루어져, 특히 사회혼란기에 손쉬운 방법으로 양산체제가 마련됨으로써 더욱 빨리 시대양식으로 굳어졌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유학사상을 정치 및 사회이념으로 삼아 풍요롭고 사치하는 풍조가 제약받게 된다. 그리고 억불정책(抑佛政策)에 따라 사찰 수공예가 대폭 위축받게 되어 기술의 쇠퇴와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 여건에서는 장인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민중의 미의식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터전을 만들 수 없으므로 민중 속에 잠재된 소박한 미의식이 뚜렷한 성격으로 움트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목공의 미(美)는 일체의 인위적인 장식성, 인위적인 조형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간결한 선(線), 명확한 면(面), 그리고 목재 자체가 가지는 자연목리(自然木理)의 미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낸 점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지적은 신라·고려 공예가 귀족적임에 반하여 조선시대의 공예는 민중적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한 것이다.

물론, 조선 초기의 수공업 역시 봉건지배층의 어용적인 것에 불과했다. 도자기와 귀금속의 경우처럼 그 당시 장인은 신분적으로 관인(官人)체제에 묶여 버렸기 때문에 사용자측 요구에 맞춰 물건을 제작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의 재정이 궁핍해지고 수공업계에 커다란 변질을 가져와 경공장(京工匠)은 실질적으로 줄고 사공장(私工匠)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7세기를 전후하여 새 시대의 기풍이 일어나 선비문화가 선명해지는 까닭에 가정 내실의 부녀자용 가구와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사랑 내지 서재용품이 기능적으로 엄밀하게 분리되어 그 나름으로 성격을 굳혀 발전하게 된다.

조선시대 나전칠기는 귀족 취미에 영합한 고려시대의 것과는 달리, 가냘프고 정아한 맛을 잃게 되며 정교하게 정제(整齊)되었던 무늬가 더욱 더 흐트러지고 거칠어진다. 물론, 왕실 유물로서 확실하거나 사보(寺寶)로서 비장되어 온 것조차 없는 실정이어서 현존하는 물건들을 통틀어 민중적 공예품으로 일괄하여 살펴보게 된다.

그 점은 나전칠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일반 목공품도 마찬가지이다. 목공예의 괄목할 만한 것은 궁궐이나 사찰 등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사가의 가구를 중심으로 언급하게 된다.

화각(華角)공예는 19세기의 사회적 추세에 따라 성행된 것으로, 그 연원은 대모복채(玳瑁伏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경공장의 존재가 유명무실화되는 반면 목공예 자체가 대중사회 속에 확산되는 현상이 농후해진다.

이렇듯 우리나라 목공예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호흡해 왔다. 여기에는 목공예 장인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목공예품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멀어졌다. 불과 20~30년 전만해도 안방에 자개장이 자리 잡고 있어야 성공한 집안으로 인정받았으며, 고급스러운 농이나 상이 자존심을 올려 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대인의 생활방식이 변화하면서 과거 목공예의 영화는 시들어졌으며 관련 산업 역시 추락하고 말았다. 이는 곧 우리나라 목공예 역사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 목공예에 종사하는 대한민국 명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들의 손을 거쳐 탄생하는 제품은 곧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명장의 손을 쉬게 하면 안 된다.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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