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원 대한민국 패션디자인부문 명장

 

 

人格을 높여주는 손끝 마술사후진양성 등 사회공헌에도 名匠

 

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옷감을 이리저리 잘라 붙여 사람 몸에 입히는 정도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옷은 인격이다. 따라서 인격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인격을 최고점에 올려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전병원(田炳元) 대한민국명장이다. 광주 충장로에서 전병원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전 명장을 만나 맞춤양복에 대한 그의 철학과 삶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전 명장과의 일문일답.

​▲ 2014년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 의미에 대해 말해 달라.

- ‘대한민국명장(名匠)’은 숙련기술의 정점(頂點)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로서는 매우 영예로운 상()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에 걸 맞는 사명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 혼자만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국가산업발전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공헌활동은 물론 후진양성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배출된 양복부문 명장은 12명 정도이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명장은 7명 정도로 알고 있다. 내가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건 광주전남지역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패션디자인 양복 부문 명장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명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다.

- 맞춤 양복 분야에서 40년 이상 종사해 오면서 나름대로는 최고의 숙련기술인이라 자부했는데 쉽게 명장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다. ‘명장' 심사는 서류, 현장실사, 면접 등 무려 5개월 동안 엄격하고 섬세한 과정을 거친다. 나는 2002년 처음 '명장'에 도전장을 내민 뒤 12년 간 7차례 탈락의 아픔을 겪은 끝에 목표를 달성했다. 그야말로 ‘78. 그래서 더욱 귀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양복업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중학교를 졸업할 시점에 길을 지나가 양복점 유리창 안에 진열되어 있는 하얀 와이셔츠를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이로 인해 내 인생이 결정됐으니 운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껏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양복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배우고 익혔다. 처음에는 솜씨가 서툴러 꾸중도 들었으나 열심히 하려는 내 모습에 반한 선배들이 자신의 노하우까지 알려주며 열정을 북돋아 주었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독립은 언제 했나.

- 초창기 밤낮없이 기술 향상에 노력을 거듭하다보니 실력 좋은 디자이너와 재단사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후 1988년 광주 충장로에 태화양복점을 창업하면서 독립하게 됐으며 창업 2년 뒤 내 이름에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전병원양복점'으로 상호를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 가게를 갖게 됐지만 배움은 계속 됐다. 당시 전국의 유명한 양복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고마운 건 배우러 갈 때마다 그 스승들은 재단 도구들을 펼쳐놓고 일일이 세심하게 알려 주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도 깨우쳐 주었다. 그런 경험이 바탕이 돼 나 역시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다.

 

전병원양복점에서 탄생하는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가.

- 옷은 단순히 몸에 걸치는 소품이 아니다. 옷은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양복은 입는 사람의 체형은 물론 직업과 인성, 그리고 심리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서 탄생하는 '명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기술연마에 더욱 정진하도록 자극을 준 고객이 있었다는데.

- 이 일을 시작한 초기에 보디빌딩선수의 옷을 만들게 되었다. 근육이 울퉁불퉁해 굴곡이 많은 사람의 옷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렵게 만들었는데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나에게 그 손님의 내가 체격이 평범하면 기성복을 사 입지 왜 여기 왔겠느냐는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 단단히 각오를 새롭게 하고 실력향상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상체형이나 변형체형에 맞게 옷을 재단하는 것은 나름대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또 눈에 뛸 정도의 신체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신체특징을 보완해 주는 옷을 만들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그 동안 취득한 자격증과 특허는 물론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고 들었다.

- 맞춤 양복업계에 40년 이상 종사하면서 기능사·산업기사 등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양복 신기술 개발과 공정을 개선해 2012'굴신체형의 양복 재단 방법'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수직상승 줄자 개발 등 실용신안 2건도 등록했다. 그리고 2010년 대만에서 열린 제23회 아시아주문양복총회에서 창작 디자인 부문 대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외 기술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후진양성에도 열성인 것으로 알고 있다.

- 맞춤양복 신기술 개발과 공정개선 연구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산업현장 교수로 위촉돼 광주권 4개 중소 봉제업체의 기술 지도를 담당하는 있으며 호남대학교와 광주대학교 의상학과 학생들에게 기술특강, 졸업 작품 지도를 하고 있다.

특히 '신사복 재단 재봉 기술선집''체형별 패턴의 응용방법' 등의 기술서적을 출간해 전국 18개 교도소, 7개 대학 의상학과 등에 무료로 기증해 남성복을 배우는 학생과 기능인들의 교재로 활용토록 했다. 그리고 1986년부터 국가기술자격시험 출제위원,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국가기술자격시험 감독위원 등을 역임하며 우수 기능인 양성을 위한 기술지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특히 광주목포교도소 재소자 기술교육을 통해 국가자격취득 40, 기능대회 입상 19회의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 동안 쌓아 온 대한민국 최고의 맞춤양복 제작 기술을 조건 없이 전수하고 있다는데.

-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만드는 양복이 아무리 좋다한들 고객의 선택이 없으면 가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 기술과 내가 만든 양복은 고객과 함께 발전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후배가 있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전수해 주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능기부가 아니라 나의 사명(使命)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고 들었다.

- 3년 전 불쑥 고급기술을 배우고 싶어 찾아 왔다는 74세의 손인수 씨다. 두 번 거절 후 세 번째 받아들였는데, 알고 보니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재미교포로 41년 만에 고국에 온 것이며 미국으로 돌아가서 맞춤양복 제작수선집을 차릴 계획인데 대한민국 맞춤양복 명장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매우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부담스런 것도 사실이었다. 나이가 많다보니 기술 습득력이 떨어지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배우고자하는 열정만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가르쳤고 교본도 직접 만들어 주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귀감(龜鑑)이 되는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 195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대부분 가정이 먹고살기힘든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양복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된 일이었지만 포기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힘들수록 성공하겠다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요즘 자신의 인생 방향을 확고하게 잡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을 하든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내와 끈기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양복변천사 100에 대해 말해 달라.

- 우리나라에 양복이 전파된 지가 백년이나 됐는데 그 역사가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안타까웠다. 그래서 사비(私費)양복변천사 100년전을 서울, 광주, 부산 등지에서 진행했다. 서재필 박사가 입었던 양복도 수집했고 고증을 통해 각 시대별로 50벌의 양복을 별도 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양복점에 화재가 나서 그때 전시품들이 대부분 소실됐지만 1930년대 원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기성복에 밀려난 맞춤양복 시대는 언제 오리라 생각하는가.

- 지난 90년대 중후반부터 기성복의 기세에 눌려 거의 무너졌던 맞춤양복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아마도 맞춤양복의 편함과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고 싶어 하는 시대적 풍조도 한 몫 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맞춤양복이 전성기였던 80년대에는 하루에 40벌 이상 주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단언컨대 그러한 시대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10여년전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저희 양복점을 찾아 왔다면, 지금은 아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를 구한 뒤 아버지를 모시고 오는 경우가 늘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가 부모님이라 들었다.

- 사실 명장이 됐을 때 가장 먼저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모님은 내가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나선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컸을 것이다. 부모님은 늘 '자기 일에 최고가 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고 올곧이 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 대한민국 맞춤양복기술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그 우수성을 국내외에 홍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남성복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있는 후배를 발굴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하고 싶고, 해내야 한다는 목표가 있는데 바로 장학재단설립이다. 어느 산업이든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 발전할 수 있는데 맞춤양복 역시 숙련기술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문적 경제적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광주시에는 대한민국명장 16명을 비롯해 다수의 세계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자들이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 내 명장과 숙련기능인들을 한자리에 소개하는 '명장관'을 만들면 학생들의 바람직한 직업관 형성과 기술인들의 사기 진작 및 산업현장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The PeoPl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