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사)안향동방사상연구소 이사장(약학박사)

안경환 이사장
안경환 이사장

 

"安珦 선생의 교육혁명과 인재육성 철학으로 국가재건해야 "

“안향의 유학사상은 고려 말 국가적인 시련과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것이 신진사대부의 철학적 기반으로 다져져 조선 개국 이념으로 탄생했고 500년을 이어 왔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의 제도적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되는 고려 시대 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1243~1306)을 연구하는 ‘안향동방사상연구소 안경환(安景煥) 이사장의 일성(一聲)이다.

안 이사장은 평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홍보이사로도 적극 활동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사재(私財) 1억 원을 출연, 사단법인 안향동방사상연구소를 안양대학교 부설로 설립하였고, 그해 12월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안향선생 학술연구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많은 관계자로부터 내실 있는 학술대회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연구소는 안향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연구해 그의 현실 국방의식과 실천정신을 숭상하고, 미래 인재양성을 위한 기초 철학은 물론 평화 통일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8년에는 성균관에서 가진 안향선생연보 출판기념회를 안 이사장과 그 아들들이 출연하여 성대하게 치렀다. 안 이사장의 이러한 행보는 여느 종친회 임원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사례일 것이다.

안 이사장은 “안향 선생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정치, 교육, 경제, 국방 등 사회 모든 분야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 사상이 되는 것이며, 특히 요즘과 같이 국내외 상황이 혼란스런 때에는 그의 이념과 철학을 더욱 체계화해 현실에 접목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북 영주에서 출생한 안향 선생의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1260년(원종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고, 이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했으며,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우리나라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 된 最高 유학자

1275년(충렬왕1년) 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했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하는데 역점을 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고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안 이사장은 “이렇듯 안향 선생은 맡은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항상 국익과 백성을 앞에 두고 정책을 실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향 선생은 1289년 2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 해 11월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 해 돌아왔다. 이러한 활동이 바로 안향 선생이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안향 선생은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했고, 이어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 해 12월 지밀직사사,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했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안향 선생은 1298년에 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이어서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안향 선생은 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일종의 장학기금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써 당시에 국자감 운영을 하는데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인재들이 경제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안향 선생은 1304년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안 이사장은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 보편화와 주자서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안향 선생이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안향 선생을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학재단 ‘贍學錢’ 설치해 인재육성에 집중

또 안 이사장은 “고려 후기에는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국내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며 “이런 시대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안향 선생의 비전이었다”고 말했다.

안향 선생은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실현하려 했다. 당시 고려의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고 적극적인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

안향 선생하면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유명하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안향 선생의 사묘(祠廟)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은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사라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으로 안향 선생의 업적과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안 이사장은 “안향 선생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조용하면서 착실하여 많은 이들이 존경했다. 계획을 잘 세우고 판단력도 뛰어나 동료들이 그를 순순히 따랐다”며 “늘 인재 양성과 학문 부흥을 자신의 중대한 임무로 여겼으며 문장(文章)은 맑으면서도 힘이 있었고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났다”고 말했다.

안향 선생은 ‘재상의 임무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섬학전’인 것이다.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장학재단’이다.

안 이사장은 “안향이 주안점을 둔 것은 인간 심성(心性)이나 이기(理氣), 태극(太極)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인 도덕 실천이었다”며 “자식이 효도하고 신하가 충성(忠誠)하고, 예(禮)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信義)로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경(敬)으로 닦고,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다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안향 선생의 齋祠인 崇祖詞 복원이 필생 염원”

이렇듯 안향 선생의 정신과 업적은 우리나라 역사 인물 중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과소평가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따라서 ‘안향동방사상연구소’는 안향 선생의 철학과 정책방향을 재융합해 혼돈에 빠져 있는 세태를 바로 세우는데 총력을 다 한다는 계획이다.

안 이사장은 “안향 선생의 이념과 발자취는 단순히 과거사가 아니다. 소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로 지배되는 ‘4차산업시대’에 가장 적합한 철학으로 시급하게 우리나라와 국민들에게 접목해 국가발전과 인성회복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역설했다.

회헌 안향 선생은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자 현대인들도 추앙할 인물임에 분명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받들고 있지만 안 이사장과 가족의 안향 선조 현창사업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안 이사장에게는 필생(畢生)의 염원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미수복지구인 DMZ 장단 일원에 일제강점기 전국의 순흥안씨 종친들이 전국적인 모금을 통해 회헌 안향 선생의 묘소를 정비하고 위토(位土)를 마련한 사실이 있는데, 이 토지의 행방을 찾아 재단을 만들어 영구히 안문(安門)의 어른인 회헌 안향 선생의 역사적인 족적(足跡)을 기리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당시 모금을 통해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안향 선생의 제사를 봉행하기 위해 성균관 뒷담에 그 제례봉행을 위한 전사청(典祀廳) 건물 자리에다 서울도심에 안향 선생의 재사(齋祠) 숭조사(崇祖詞)를 복원하는 사업이라고 한다.

이렇듯 안 이사장은 선조 현창(顯彰)사업에 열정적인 의지를 보였으며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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