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북동일회(小北同一會) 400년사

 

1.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생김

조선 선조초의 사대부(士大夫)들은 폐해가 많은 훈신(勳臣)과 척신(戚臣)을 싫어하고, 청렴하고 공정한 도덕정치를 원했다. 이러한 풍조와 사상을 청의(淸議) 또는 청론(淸論)이라 하였다.

1575(선조8)년에 문명(文名)이 높은 김효원(金孝元)이 인사권을 가진 이조정랑에 천거되니 심의겸(沈義謙)은 김효원이 과거에 권문세가에 출입했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했다. 그 뒤 심효원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니 김효원은 그가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외척이라고 반대했다.

이때 사대부들은 두 파로 갈라졌는데, 김효원이 서울 동쪽 낙산에 산다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울 서쪽 정동에 살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서인이라 불렀다. 이와 같이 주장이나 이해를 함께 하는 사대부의 집단을 붕당(朋黨)이라 하는데,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이 우세하였다.

1589(선조22)년에, 정여립(東萊 鄭汝立 ?~1589)은 원래 율곡(栗谷)의 제자로 서인이었으나 동인으로 방향을 바꿔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전주로 낙향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사병을 길러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돼 체포 직전에 자살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후세에는 조작됐다는 설도 있다. 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처리하던 서인 정철(延日 鄭澈 1536~1593)은 이발(李潑 1544~1589) 등 수많은 동인들을 연루시켜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여 원한을 사게 됐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라 부른다.

2.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뉨

1591(선조24)년 좌의정 정철이 세자책봉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자 기축옥사로 원한이 큰 동인이 정철을 공격했다. 이때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파인 남인과 강경하게 처리하자는 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남인의 대표인 우성전(禹性傳)이 남산 아래에 살았고, 이미 죽었지만 가장 피해가 큰 이발(李潑)이 북악산 아래 살았었기 때문이다. 북인의 대표는 이산해(李山海)였다.

3. 북인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뉨

선조실록 1599(선조32)년 11월 26일조에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상감에게 아뢰기를 “…북론(北論)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소북은 선비의 이름을 붙일만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북인의 신진파인 이조정랑 남이공(南以恭 1565~1640)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 1547~1609)의 대사헌 임명을 청의(淸議)로 반대함으로써 홍여순파의 대북과 남이공파의 소북으로 나누인 것이다.

이때 대북의 역공을 받아 후세에 소북7학사로 선정되는 김신국(金藎國) 남이공 박이서(朴彛敍) 송일(宋馹) 이필형(李必亨) 등 5인은 1599년 12월 4일에, 최동립(崔東立)과 박경업(朴慶業)은 1600년 2월 29일에 삭탈관작 되어 선조말까지 7~9년간 벼슬을 못하였다. 상소로서 7학사를 구하려다 오히려 지방으로 좌천됐다는 소구7학사보외(疏救七學士補外) 3인은 모두 홍여순을 논핵(論劾)하여 7학사를 도왔는데 이필영(李必榮)은 풍기군수(1600.9.6)로, 경섬(慶暹)은 남원부사(1601.12.10.)로 보외(補外)된 사실은 있으나 이덕형(李德泂)의 보외사실은 실록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1605(선조38)년 선무원종공신록권에 김신국 남이공 박이서 송일 최동립 등 5인은 2등으로, 이필형은 3등으로 책록 되었는데 직명이 모두 급제(及第)로 되어 있어 삭탈관작 중임을 알 수 있다.

4. 소북의 전성기(全盛期)

1602(선조35)년에 소북의 류영경(柳永慶 1550~1609)이 선조대왕의 신임을 받아 우의정이 되고 이어서 좌의정 영의정에 오르면서 선조말까지 7년간 소북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 후 대북에게 실권(失權)한 다음 대한제국말까지 소북은 한 번도 집권을 못하고 서인의 분파인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그리고 남인의 대세 아래 면면히 이어졌다.

5. 소북 안의 류당(柳黨)과 남당(南黨)

「韓國史通論(邊太燮 2001)」에 “…소북은 柳黨(濁小北)과 南黨(淸小北)으로 나뉘어졌으니 북인 내에 남아있는 훈척계 요소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하였고,

「典故大方(姜斅錫 1924)」의 四色黨派原因略說에서 소북은 선조 말에 柳黨(柳永慶 등 4인)과 南黨(南以恭 등 4인)으로 나뉘었다고 했다.

「黨議通略(李建昌 1852~1898)」에는 류당의 柳永慶 등 31명과 남당의 南以恭 등 7명의 명단이 실려 있고,

「丁戊錄(黃有詹 1609)」에는 柳黨의 류영경 등 34명과 南黨의 남이공 등 6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선조 말에 류영경은 영의정으로서 선조대왕의 뜻에 따라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 1601~1614)을 옹립하려 했고, 아무런 벼슬이 없던 남이공은 이미 임진왜란 때 세자로 정해 분조(分朝)까지 맡겼던 광해군(光海君 1575~1624)을 세자로 유지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 짧은 기간이나마 소북 안의 분파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柳當(34인) : 류영경(柳永慶 영의정), 허욱(許頊 좌의정), 최천건(崔天健 이조판서), 성영(成泳 이조판서), 송언신(宋言愼 이조판서), 홍식(洪湜 대사헌) 성준구(成俊耈 사인), 이효원(李效元 대사간), 이유홍(李惟弘 부호군), 김대례(金大來 직제학), 송응순(宋應洵 부제학), 송부(宋부 이조정랑), 이덕온(李德溫 헌납), 송준(宋駿 이조참의), 송일(宋馹 7학사, 지추), 남복규(南復圭 지평), 류성(柳惺 헌납), 류업(柳업 ), 박승종(朴承宗 대사헌), 이정(李瀞 ), 류영근(柳永根 대사간), 류영순(柳永詢 참판), 이경기(李慶褀 장령), 박이장(朴而章 대사간), 황섬(黃暹 부학), 황시(黃是 전한), 황근중(黃謹中 지평), 조명욱(曺明勗 문학), 성이문(成以文 문학), 김신국(金藎國 7학사, 보덕), 민경기(閔慶基 교리), 박안현(朴顔賢 이조좌랑), 신광립(申光立 교리), 신요(申橈 지제교)

南黨(7인) : 남이공(南以恭 7학사, 종부시정), 김시국(金蓍國 김신국의 아우, 대사성), 남이신(南以信 남이공의 형, 병조참판), 박이서(朴彛敍 7학사, 사간)

임연(任兗 임장의 형, 낭청), 임장(任章 정언), 류희분(柳希奮 광해군의 처남, 집의)

6. 광해군시대의 소북

19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이 득세하고 소북은 실권했다. 류영경을 비롯한 많은 소북인사들이 무신옥사(戊申獄事)로 대북의 박해를 받았다.

일부 소북인사는 등용되기도 했지만 폐모론(廢母論)에는 반발하여 결국 대북세력의 압박을 받았다. 전 참찬 남이공은 “죽지 않은 류영경이며 다시 살아난 金悌男”이란 죄목으로 탄핵 6년 동안 유배되었고, 참판 박이서는 영광군수로 강등되기도 하고 60세에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西海의 풍랑으로 익사했다. 임숙영(任叔英)은 대책문(對策文)으로 광해군의 미움을 받았다.

7. 인조반정 이후의 소북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집권함으로써 대북은 완전히 몰락하고 소북은 회생하였다. 무신옥사로 해를 입은 소북인사들은 모두 신원복권(伸寃復權)되고, 혼조시대(昏朝時代)의 박해와 폐모론에 가담여부에 따라 소북인사들은 서인의 대세 아래 근근이 벼슬을 하였다.

류심(柳淰 1608~1667)은 평안감사와 예조참판에 이르고, 김신국은 평안감사와 호조판서를, 남이공은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필영은 개성유수를 하고, 이덕형은 도승지외 우찬성에 이르렀다. 임숙영(1576~1623)은 사헌부 지평에 이르고 독서당(讀書堂)에 들었지만 짧은 생을 마쳤다.

정묘호란(1627) 때 南以興은 평안병사로서 後金을 막다가 안주에서 순절했다. 任翰伯 南선 姜栢年 申濡 朴守玄 李休徵 沈齊 鄭昌冑 등 후세에 8문장으로 추앙받는 인사들은 대체로 인조 효종 현종 대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러나 소북인사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류영경이 영상일 때 좌상이던 허욱(許頊)은 소북이었으나 그 자손이 남인으로 가 남보(南譜)에 실림으로써 북보에서 제외되었고, 김신국은 영중추부사(정1품)에 이르렀지만 정승에는 오르지 못했다. 소북이던 남이웅(南以雄)은 이괄(李适)의 난에 유공하여 좌의정에 올랐으나 역시 소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남인이 되었다.

8. 팔약조(八約條)의 고찰

1657(효종8)년 9원 10일 정동 배상일 사과(裴尙一 司果) 댁에서 소북 34인이 모여 8약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83년에, 약조인 박류(高靈 朴瑠 1600~1658)의 10대손 박성구(朴晟九)가 제시한 문건인데 이 밖의 어느 소북 문적(文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귀중자료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나타난다.

약조인 총34명의 생몰연대를 알아보니 19명은 이미 작고했고, 13명이 생존했으며, 배상일과 강원희(反論 西人) 등 2명은 미상이다. 송영희(宋永禧 伴菊軒)는 송승희(宋承禧 伴菊堂 1538~1592)의 오기라 여겨지는데, 그는 7학사 송일(宋馹 伴鶴翁 1557~1642)의 아버지로 1599년 소북성립 이전에 작고하였다.

배상일은 북보에 배응경(裴應褧 1544~1602)의 장자(의령남씨가본) 또는 장자 인지(紉芷) 차자 상익(尙益 1581~1631)에 이은 3자(초계정씨가본 및 창령성씨가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배씨세덕보(裴氏世德譜)와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아버지 배응경과 형 배상익은 들어 있어도 배상일은 없다. 따라서 배상일과 배상익은 동일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약조인 배상일 밑에 “나이가 19세인데도 입이 무거워 이 모임을 함께 하게 되었다(年十九而 以沉黙之 故會于此).”고 기록되었으니 정말 배상익과 동일인으로서 1581년이 그의 생년이라면 19세가 되는 1599년은 바로 소북성립연도와 부합되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만약에 배상일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19세면 1621(광해군13)년이 되니 1657(효종8)년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8약조는 소북생성 때인 1599(선조32)년부터 시작하여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계속 이어지다가 1657(효종8)년에 당시 13명 이내의 생존자들이 모여 재확인 한 것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겠다.

9. 숙종 ․ 경종 ․ 영조대왕 시대의 소북

1674년 숙종즉위로 세력을 잡은 남인은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렸다가 후에 다시 합치고, 1680(숙종6)년에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다시 세력을 잡은 서인은 1683(숙종9)년에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 노론 소론 남인 북인(소북)의 4색 당파가 이루어졌다.

1689(숙종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세력을 잡기도하였으나 결과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 서인 우세였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는 노론 우세였는데, 소북은 조용히 관망이나 하는 상태였다.

1725년 영조즉위 후로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어 표면적으로는 4색 당파가 해소되고 안정화된 듯 보였으나 내면으로는 4색의 파벌은 계속되었다

후대에 소북5군자(小北五君子)로 선정된 宋瓆 尹彙貞 嚴慶遂 李庭綽 嚴慶遐 등 소북인사들은 대체로 이 시대에 활동하였다.

10. 정조 ․ 순조 ․ 헌종 ․ 철종대왕 시대의 소북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탕평책은 계속되었으나 남인이 우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훈신 홍국영(洪國榮)으로부터 시작되어, 척족 안동김씨(순조 때)로 이어지고 풍양조씨(헌종 때)를 거쳐 다시 안동김씨(철종 때)로 이어졌는데 노론의 대세는 그대로 계속됐다.

소북인사로 강세황(姜世晃)은 한성판윤에 이르고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평가되었으며, 박제가(朴齊家)는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뽑히고 북학의(北學儀)를 비롯하여 실학(實學)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김복휴(金復休)는 현존 북보의 最古本으로 인정되는 ‘북인보(北人譜)’를 편찬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은 光海朝에 영의정을 하였으나 폐모론에는 반대하였고 인조반정 때에는 부자가 함께 자진(自盡)하여 주군(主君)에 충성한 의리가 인정돼 1857(철종9)년에 관작이 회복됨으로써 그 후예들이 북보에 다시 오르게 됐다.

11. 고종 ․ 순종황제 시대의 소북

1863년 어린 고종(高宗 1852~1919)의 즉위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면서 그동안 소외됐던 북인(소북)과 남인이 등용됐다. 소북인사로서 임백경(任百經)이 우의정(1864)에 오르고 강로(姜㳣)는 좌의정(1872)에 올랐다.

정윤영(鄭胤永)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이념으로 척화(斥和)의 소(疏 1881)를 올렸다가 유배도 됐지만 學行으로 사간(司諫)에 오르기도 했다.

이회정(李會正)은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예조판서로서 왕후국상발표를 한 죄로 처형되었고, 엄세영(嚴世榮)은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에 올랐다.

김규식(金奎軾)은 충주관찰사(1895)로서 고종의 명에 따라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하다 의병에게 살해되었고, 남상덕(南相悳)은 참위(參尉)로서 한국군해산(1907)에 반대 일군(日軍)과 격전(激戰)끝에 전사하여 광복 후 건국공로훈장(1962)을 받았다.

12. 일제 강점기의 소북 후예(小北後裔)

(1) 동일사(同一社)의 창립

1920년 12월 일 소북후예들이 모여 同一社를 창립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있은 다음 망국의 한을 달래며 선조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모인 것이다. 사장(社長) 남규희(南奎熙, 1859~1935 이후) 등 37인의 명부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동일사의 사(社)는 회(會)와 같은 뜻으로, 동일사는 회사가 아니고 소북후예들의 모임인 것이다.

(2) 동일친목회(同一親睦會)로 개명(改名)

1929년 1월 일 同一社를 同一親睦會로 이름을 바꿨다. 아마도 일제의 간섭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 현재 총19성 290명이 기록된 회원명부가 현존하는데, 이 명부에는 부록으로 규약 ․ 서문 ․ 발문 ․ 略誌 ․ 회원 한시 (32수) 등이 들어 있다.

(3) 同一의 의미와 동일친목회의 취지

「同一親睦會 會員名簿(1935)」에, 규약 제2조 “본 회의 목적은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돈숭(敦崇)하여 미풍을 진작한다.”고 한 것은 표면상의 목적이며, 제5조에 “본 회원은 특수한 우의(友誼)를 가진 인사로서 본 회의 목적에 찬동한자에 한한다.”에서 ‘특수한 우의’란 바로 소북후예의 관계임을 암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명부 서문(序文)에서 회장 남규희가 “우리는 동일한 시대에 태어나고 동일한 나라에 살아 그 마음이 같고 그 덕이 같으며 그 취향이 같다. 동일친목회의 성립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生同一時 居同一邦 其心同 其德同 其趣向同 同一親睦會所以成立).”라 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같이 똑같다. 同一하다.”는 뜻이 되겠다.

또한 이 명부 발문(跋文)에서 고문 이순하(李舜夏)는 “이 모임의 취지는 첫째로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고 둘째로 자손들이 길이길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所以設此 一以 承祖先遺規 一以 望子孫永好也).”라고 취지를 밝혔다.

남규희는 국권상실 전에 규장각 직각과 궁내부 특진관(정2품)을 지냈고 1926년 순종황제 훙서(薨逝) 후에는 고종․순종황제실록 편찬위원으로 일했다.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으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13. 광복 이후의 소북 후예

(1) 동일친목회의 재건(再建)

1959년 11월 일 동일친목회의 재건모임을 가졌다. 1945년 전후의 태평양전쟁 ․ 8․15 광복 ․ 6․25 동란 등을 거치면서 동일친목회의 활동은 상당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6․25 휴전이후 사회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동일친목회의 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총 21성 322명이 회원명부에 기록됐다.

1935년 회원명부에 들어있는 많은 인사는 타계하거나 혹은 불참하여 南相一 南相瓚 李起鵬 李範昇 李徽載 朴海遠 任兢淳 任鴻淳 任興淳 등 몇몇 인사만이 1959년 명부에 다시 등재되었으니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2) 同一親睦會編 北譜 편찬

1983년 3월 일 鄭載漢 金春永 任行宰 李康年 南慶祐 朴晟九 朴紀遠 柳元熙 등 8명의 편찬위원이 새 북보를 편찬했다.

이 북보에는 淸州慶氏家本 북보의 서문과 草溪鄭氏家本 북보의 서문을 비롯하여 八約條와 約條人(34명), 동일사임원명부(1920), 동일친목회회원명부(1935), 동일친목회재건회원명부(1959), 등 귀중한 자료가 들어있다.

(3) 同一會로 개칭

2003년 8월 12일, 은행나무집(서울 종로3가)에서 同一親睦會의 명칭을 同一會로 개칭하는 결의를 했다.

同一親睦會는 1929년에 同一社를 개칭한 것인데 일제의 간섭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본회가 친목도모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라 소북선조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주된 취지이므로 ‘친목’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4) 小北同一會로 개칭

2008년 5월 13일 同一會의 명칭을 小北同一會로 바꿨다.

소북선조들은 小北이란 이름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보도 흔히 諸家譜라 하였고, 同一社나 同一親睦會의 어느 문적에서도 소북을 들어낸 예가 없다.

小北이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시대에 小北先祖들이 불렀던 이름이고, 동일사 ․ 동일친목회 ․ 동일회 등의 同一은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 小北後裔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나 동일회만으로는 그 성격을 잘 이해하기 어려워 소북을 붙여 小北同一會라 한다면 누구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5) 小北八約條碑 建立

2008년 10월 14일 柳永慶 相公 墓域에 소북8약조비를 세웠다.

앞면에는 8약조와 취지를 적고, 뒷면에는 8약조인 34명을 비롯하여 소북 7학사, 소구7학사보외(3명), 8문장, 5군자 등의 명단을 적어 소북의 핵심내용을 한데 모은 것이 됐다.

다만, 약조시기에 대하여 의아한 사실이 발견되는바 앞 8항의 ‘8약조의 고찰’을 참고하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6) 小北同一會報 創刊

2011년 7월 1일 소북동일회보를 창간했다.

매월 둘째 화요일에 모이는 月例會의 통지서를 겸하여 지난 월례회의 결과와 소북에 관련되는 여러 소식들을 싣기로 했다.

창간호 부록으로 「小北同一會 略史」를 싣고, 제2호(2011.9.1.) 부록에는 「會員作詩」와 「小北家 이야기」를 실었다.

(7) 小北同一會編 북보 편찬

2012년 8월 일 소북동일회편 북보 상 하권(200질)의 편찬을 완료했다.

1983년 동일친목회편 북보를 기준으로 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부족한 것은 보완했다. 1983년 편 북보의 편찬위원으로서 筆寫를 전담했던 柳元熙 고문이 본 북보의 筆寫와 편집도 주도했다.

(8) 소북동일회사백년사의 발간

2018년에 소북 300년 의 역사와 동일회 100년의 내력을 한 데 묶어 소북동일회사백년사를 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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