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이치대첩’의 영웅 - 권율 장군

“그 시대를 겪지 않고서, 그 시대를 함부로 논하지 마시오. 나도 의병대장이었소.”

‘코로나 사태’로 ‘행주대첩제’도 못하게 되었지만. 임진왜란 최대의 명전투인 ‘이치대첩제’마져 조촐하였다. 이 이치대첩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다. 행주대첩은 그저 이치대첩의 부록에 불과 할 뿐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전직 금산군수 권종과 그 아들 권준, 1차 금산전투의 고경명 부자, 2차 금산전투의 영규대사, 김제군수 정담의 전사를 통한 엄청난 분전과 700의총의 민초의 항전이 이치대첩의 밑바탕임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토왜(土倭, 친일파)가 아직 살아 나라를 어지럽히고 진왜(眞倭,군국일본) 의 음모를 막아야 하는 이 중차대 시점에서 이 ‘이치대첩’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투에 대한 의병의 공적과 희생은 이 이치대첩 뿐만아니라 저평가 된 것이 많다. 영천성 탈환의 권응수 장군의 예도 그것인데 선조라는 암군의 음흉하고 저급한 행동에 의한 것이니 오늘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대담 : 권오철 기자(안동권씨 부정공파 화은공계 35世)

▲ 권장군님! 400여년 만에 ‘배티(梨峙)’에 앉아 보시는 소감이 어떠신지요?

(和平)은 역시 좋은 것이요. 이렇게 모시적삼 하나 걸치고 평상에 앉아 벗들과 농주 한잔에 취해 본다면 이것이 幸이요 福이 아니겠소. 우리들 사람의 욕심은 그런 걸 잊게 한단 말이오. 온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둘러앉아 보리밥 숟갈이라도 뜰 때, 그것이 곧 축복인데 말이오.

▲ 이치대첩을 장군께서 행주대첩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시는 데, 객관적인 판단이십니까?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와 있소. 행주싸움은 이미 내가 이치전투, 독산성전투 등으로 계급이나 병력이나 상당히 안정돼 있었고 선거이 장군, 변이중 장군 등의 무기 공급이나 포지션이나 든든했고 위에 明나라 군대도 있고, 왜군은 벽제에서 이겨서 방심했고 또 지쳐 있었고, 나름 우리의 준비도 잘 되어있었다고 보오.

이치전투는 이미 용인전투에서 李洸 장군이 나의 말(우회 한양점령)을 안 듣고 매복하는 왜군에 말려들어 박살나서 도망가고, 겨우 나와 황진의 전라도 병력만 제대로 퇴각해서 전열을 가다듬었소. 워낙 사기가 떨어져서 모병조차 어려워 ‘10개 항목’ 포고 후에 겨우 1500명의 병사를 모으게 된 것이요. 당시의 심정을 내가 ‘나랏일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고 말한 적이 있소.

 

▲ 이치대첩이 승리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리고 의병장이라는 말씀은?

원인은 물론 죽기살기로 싸운 것이지만, 멤버를 보면 의병이 라고는 해도 前職이 화려하고 모두들 한가락씩하는 인물들이요. 이들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싸웠냐하는 것은 후에 진주성 싸움에서 많이 전사 하게 되니 그걸 보면 알지요. 나도 황진이 총에 맞아 주춤할 때 직접 칼을 휘둘러 적장을 베고 힘든 싸움이었소.

우리에게 전진만이 있고 후퇴는 없으며, 우리 앞에 죽음만이 기다리고 삶은 없다!’ 이거 한마디로 밀어 붙였고 뒷걸음 친자는 누구든 전투 후에 처결부터 하고 다음 우리 병사의 수급을 수습해서 약식으로나마 조의를 표해주었소. 동지의 시신을 찾아 그 전부를 못 가져 오고 머리를 잘라 말가죽 부대에 넣어 오는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소!

황진(43,남원生,동복현감-화순군수)은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아주 완벽한 군인이오. 활솜씨는 이미 황윤길(풍신수길의 침략 예정을 보고)과 왜국 정탐을 가서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려서 왜인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실제 쌈지돈을 털어서 칼을 사가지고 올 정도로 대비가 좋았고, 활로 적병을 선봉에서 무수하게 사살했소.

황박(29,함열生,선전관 만호출신,의병)은 500명의 의병을 모병 참전하고 훌륭하게 싸우다가 戰死했소. 바로 옆 웅치에서도 잘 싸웠고 말이오.

기병장(특공대) 권승경(19,서울生,의병)이는 나의 바로 위 형 권준의 막내인데 퇴각하는 적병을 영정곡(태고사 삼거리)에서 매복하다가 기습해서 숨통을 끊어주었소.

편비장 위대기(33,장흥生, 해남현감출신 무인)는 800근의 활을 당기는 장사인데 황진과 함께 엄청 잘 싸웠소.

그리고 편비장 공시억(화순生, 의병), 주화 魯認(27,나주生, 별제-6급), 의병 김제민(65,고부 生, 전직군수),양응원,박흥남 (남원生), 권래(순천 生, 수문장 출신), 노홍(장흥生, 무과출신), 양대박(고흥生,진사출신) 그리고 鄭忠信(17,나주 노비출신, 무과)을 들 수있는데, 이치승전보를 왕에게 전하고 금남군(광주 錦南路의 기원)으로 봉함까지 받고 머무를 것을 요청 받으나, 나에게 보고 하기 위해 그 먼길을 다시 온 아이요. 나이 불과 17세요. 뒤에 정묘호란, 이괄의 난에 큰 공을 세웠다지요.

제장의 면모를 보면 나와 황진을 빼면 거의 의병이지만 전직이 무관이고 우수한 장수이고, 수송담당 소황과 소제는 황진장군의 처남들요. 그리고 나와 조카 만 빼면 모두 全羅道 출신들오. 즉, 전라도 광주목사인 나와 전라도 사람의 단결 만든 것이랄까?

主簿(종6품) 정홍수(鄭弘壽)가 정인지의 5대손인가 그런데 ‘이치’에서 전사했소. 그해 11월에 전지가 내려서 살아 있었고 후일 행주대첩에서 전사했다고 하나, 이치대첩의 첨병으로 적진을 살피다가 총에 맞아 절명시(임금 보다 먼저 죽어 송구, 죽어서도 조국을 보위하리라~)를 남기고 죽은게 아무래도 맞는 거 같소.

방어 장비들이 목책(말뚝),녹채(대나무),여색(성위의 담), 수마석(돌맹이)이 잘 정비되고, 金鼓(북),징, 오색기, 연기 등으로 신호와 독전체계를 나름 완비했소.

말이오. 명색이 관군은 나와 황진 정도뿐이요. 그리고 그전에 고경명 부대가 금산 진격에서 전멸하고, 조헌 의병 8000명과 영규대사의 병력이 칠백의총, 사백의사비 로 남아 있소.

임진왜란에서 정부가 한 게 뭐 있소. 보급이 있소. 병력이 있소. 전쟁 초기에 사령관을 교체하니 전라, 충청, 경상 담당 관군은 전부 도망갔소. 그저 말로만 독전을 하고 임명장이나 주는 거와 明나라에 구걸 하는 거 밖에 더 있었소. 혹자는 50여회의 전투 중 10회 정도만 의병이 주도 했다하나 가당치 않은 소리요. 사실상 전부 의병인데 무슨 관군이~ 이 땅을 관군이 지킨 적이 언제 있었단 말이오.

의병전이고 그 후 행주대첩은 민간과 의병, 관군의 연합전이었소. 적의 肝을 씹어 먹는 헤프닝도 여기서 일어나오. 처참하기 이를 때 없었고, 사실상 바다 속의 섬인 행주산성의 干滿의 차를 이용하여 왜병을 ‘밤새 안녕’하고 싹 쓸어버린 요인도 있소.

 

▲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숨이 차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일부 史官들의 의견을 보면 장군께서 비겁하게~ 전투를 아낀다는 말(조심 스럽게)이~~

소리요! 물론 객관적인 시각은 필요 하겠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자들은 함부로 그 시대를 논하지 마시요. 당시에 왜군이 얼마인지 아시요. 수년간 전투로 닳고 닳은 정병 15만명이 9개 팀으로 나누어 경쟁적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우리의 관병은 겨우 전방부대 2000명에 일반군 6000여명이었소. 그것도 정여립 모반 조작(?) 사건으로 1000명의 선비가 죽고, 동서분당이 격돌하고 노회하고 콤플렉스 많은 임금은 이를 이용하여 서로 죽이게 했소. 송강 정철의 서인을 이용 동인을 죽이고 이제 다시 토사구팽, 정철을 毒澈이라 욕하며 내치고난 상태에서 겨우 벗어나자마자 난리가 난 것이요.

그리고 정철의 경우를 봐도, 정직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오. 옛말에 ‘정직하면서 德이 없으면 잔인해진다고 했소!’

전투도를 보시요. 보통 조선군vs왜군 인원을 보면 1,000:15,000 이런 식이요. 여기서 정규전을 한다면 그건 자살행위요. 용인전투도 기다리지 못하고 덤비다가 말이 근왕병 5만이지 오합지졸로 패배 해산 당하고, 이치전투에서도 고경명 의병부대를 보고 좀 기다리라 했으나 정규전으로 패배, 조헌과 영규대사도 마찬가지요. 내가 이틀 늦었다고 그 모양으로 진격하여 도리어 평지에서 기습을 당해서 결국 칠백의총, 사백의병총으로 남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요.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의 희생이 헛된 것은 아니오. 그들이 전멸 하는 동안 적들도 엄청난 손실로 기가 꺽이고, 조선군의 사기는 충천하고 ‘이치대첩’ 승리의 기반이 되었지요. 그러나 전쟁은 신중해야 하오. 내가 이치전투, 독산성전투, 행주대첩, 파주산성수비 등 모두 단기간에 끝낸 것은 방어와 기습위주였기 때문이요. 적은 수의 병사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장 적절하오.

살펴보시오. 왜군이 내가 하는 식으로 한 것은 우리의 전멸이요. 왜군이 우리 패장들이 한 방식으로 한 것은 그들의 전멸이요. 전자는 용인전투, 금산전투, 후자는 행주대첩 그리고 파주산성을 가니 明의 후방을 압박 한양탈환의 기회가 오지 않았소. 뭐가 겁쟁이란 말이오. 史官이라도 역시 책상물림 먹물이든 인간에 불과하오. 제 손으로 돈 한푼 안 번 것들이 무슨 경제개혁이니 나발이니 떠드는 것과 같은 것이오.

義氣는 높이 사지만, 성급한 전투와 전멸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오. 전장에서 죽은것만 장땡이요. 잘싸우고 생환한것이 더 위대하오? 말하기 좋아하는 역사가는 전자의 경우만 기억하오.

▲ 일설에 의하면 원균vs이순신등 東人 류성용이 나름 편파적인 인사를 했다는 말도 있고 특히 그 배설장군 문제는 말이 많은 데요.

망하고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런게 얼마나 작용했겠소. 장수는 그냥 싸울 뿐이오. 배설(裵楔)은 원균 부대에 소속되어 그리되었지만, 역시 영웅이오. 그 풍신수길이 아끼던 흑전구침(黑田句沈)의 목을 벤 것도 그이요. 내가 원균을 독촉하여 패전하게 했다지만, 결국 왕명을 어겼다면 마찬가지 결과가 온다고 봐야하오. 그래도 배설이 도피시킨 12척이 尙有十二隻 이라는 신화를 만들었고 조선 수군 상승신화의 기반이라고 봐야지~ 씁쓸하지만 말이요.

그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쟁 영웅 이순신, 곽재우는 물론 나까지도 마찬가지 운명이요. 나는 전쟁 끝나고 겨우 자연스럽게 사라지고(자연사), 곽재우는 몸을 낮추고 신비스런 포장으로 사라지고(신선), 이순신은 아주 극적으로 멋지게(전사) 갔소. 배설은 이래저래 죽어 줘야하는 신세(처형)였을 뿐이오.

어디 억울한 죽음이 한둘이겠소. 더구나 망하는 왕조에 콤플렉스 많은 지도자가 음흉한 술책으로 국정을 농단한 결과가 아니겠소. 그 죄값은 결국 光海로 이어지고 또 ‘인조정변’과 병자호란의 국난으로 가지 않았소.

▲ 그리고 도원수가 장군의 최고 벼슬인데 도원수로 불리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 아주 그럴 듯한 이름이요. 그러나 실제 임란초에 최초의 승전보를 올린 해유령전투의 영웅 부원수 신각(申恪)을 억울하게 죽게 한 문약한 김명년이 에다 팔도도원수 까지 했지만, 그거 대단한 거 아니요. 도체찰사(국방부 감찰관, 보안사령관급)라는 거도 있고, 조선은 왕의 신임에 따라 그 권한이 왔다 갔다 하고 실제 전투에서는 대장이 최고이고 임금이 처분권의 상징인 칼을 하사하면 더 권한이 쎈 것이고, 뭐 그런거요. 또 都元帥는 정규직도 아니고 임시직이요.

▲ 슬하에 따님 한 분 뿐이시고 그 사위가 이항복으로 유명한데 에피소드도 많지요.

~ 내가 46세에 무과에 붙었는데, 이 서방은 그 2년전 25세에 알성급제, 내가 54세 늙으막에 호조정랑(재무부 인사과장, 보통 30대 관료)때에 그는 35세에 동부승지(청와대 수석), 내가 이치전투 때 광주감사(광주시장-당시는 나주가 제일)때 도승지(청와대 비서실장)이니, 하여간 그 뒤로 전라감사(도지사), 도원수(정2품) 까지 했지만 항상 사위보다 낮았어, 그는 병조판서(국방장관) 몇 번, 이조판서, 나중에 우의정(부총리), 대제학(문교장관, 서울대 총장)등을 했으니 항상 나보다 위였지, 그리고 나랑은 친구 같은 그런 사이이기도 하고, 보통 개그맨이 아니잖아 이항복이, 흐~ 딸 하나라서 형의 아들이 양자로 이어지지만, 그나 저나 아직 까지 여기저기서 나를 위해 제사를 봄가을로 해주니 뭐 꼭 신체적 자식만 자식이 아닌 것이지 않소. 아 그리고 나도 추증이지만 영의정이야, 결국 이서방과 같은 영의정, 하~(파안대소)

▲ 영의정(국무총리) 아들로 음서(특채)로 관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오랫동안 낭인(건달)으로 사셨는지요. 그리고 남기신 글들도 적고..

사회적 지위가 그의 인격과 일치 하지는 않소.’ 이등병이 대장보다 애국심이 적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처럼 말이요. 정말 전장에서 그런 거 많이 보았소. 군졸과 아낙이 적과 죽도록 싸우는데 장군급들은 도망가기 바쁜 꼬락서니 말이요. 그 놈들이 누군지는 임진왜란 첫 장부터 잘 나와 있소. 아니 도망가는 놈들의 말(馬)당번까지 공신록에 올리는 그런 놈들이 어디 있소.

옆으로 샛구려~ 아버지(영의정 권철)가 임종시에 나를 보고 눈물을 떨구며 ‘내가 너 같은 걸 낳았구나’ 했을 때 대오각성해서 과거에 응시했다하나 꼭 그런 건만 아니고 인생경험을 더 쌓고 견문을 넓힌 기간이었소. 물론 너무 길어서 탈이었지만, ㅎ~강태공은 80에 백면서생에서 일국의 재상이 되지 않았소? 그에 비하면 내나이 40은 어린 편이었지,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상식을 쌓았다고 봐야지, 그리고 文集이 없다는데 기실 내고향인 강화 연동에 문집이 많았는데, 병자호란 때 다 타버렸다고 하더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충무공전서’에 삐까 번쩍~

▲ 행주대첩이야기도 듣고 싶지만 이치대첩 이야기가 주가 되니 나중에 기회를 같기로 하시지요.

정말 왜란의 중요한 분기점이고 이로써 이순신이 전라도에서 시간을 벌 수 있었고, 행주에서 왜군이 불필요하게 공격하다가 무지막지하게 패퇴한 이유도 되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다.)라는 게 빈말이 아니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소. 이치대첩에 <5권씨의 활약>을 말이요. 나(權慄)는 그렇고, 이치대첩 두 달 전에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나의 종형인데 장렬히 전사했소. 60나이에 양곡관리나 하라는 감사의 명령에 그러고 있다가 불과 200의 오합지졸로 개티전투에서 장렬한 죽음을 택한 것이요. 이때 들 권준(權晙)도 의병으로 같이 죽었소.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변응정으로 이어지는 분전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치대첩에서는 아까 이야기 나온 조카 권승경(權升慶)과 순천사람 의병 권래(權萊)가 있소. 또 권협(權悏)도 승전비에 있고 광주시내 창의비에는 有司 권동현(權東鉉)도 나오니 權門이라면 기억해두시오. 이름들이 이 전투 저 전투에 섞여 나오긴 하지만 좌우간 나의 부하로서 각종 전투에 싸운건 분명하오.

꽃 피는 춘삼월 행주산성에서 또 봅시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장군이 가장 부하를 많이 죽인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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