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대한독립군 이범윤의 대한의군부

류현수 작가

서(序)

대한독립군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김좌진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봉오동 청산리 우당 이회영 등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청산리 전투의 주역은 김좌진이 아니고 봉오동전투의 주역도 홍범도가 아니다. 더하여 말하자면 대한독립군 최고의 주역 역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이 아닌 이범윤이라는 분이다.

1902년, 이범윤은 간도 시찰사가 되어 간도를 돌아본 후 그곳, 대한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간도관리사를 자청, 교지를 받아 국토와 백성을 지키는 간도관리사가 되고, 정부의 지원이 없자 자기 스스로 포수들을 끌어 모아 사포대(私砲隊)를 조직 청나라와 싸웠다. 1905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그 사포대를 의병의 군대로 탈바꿈하여 일본군경과 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의병의 지주로서 대한독립군의 어른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부대를 부활시킨 후 일본과 싸웠다. 공적(公的)으로는 대한군정서의 일원이 되어 청산리전투에 참여했으며 상해임정의 군대인 대한군정서의 총재와 각 독립군과 단체의 어른으로 활동하신 대한독립군의 역사이다.

그분이 사포대를 이어 세운 의병군대와 독립군 부대 이름이 대한의군부 약칭 의군부이다.

이번에는 대한독립군 역사의 기둥 축인 그 의군부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의군부의 창설

의군부는 이범윤에 의해 창설된 연해주 의병부대의 이름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이범윤이 창설한 이 의군부의 이름은 1906년에 처음 등장한다.

이범윤의 의군부의 기원은 간도 사포대이다. 간도 사포대는 간도시찰사였던 이범윤이 토문강으로 명시된 청나라와의 국경분쟁과 간도에 이주한 대한제국의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광무제에게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한 상소에서 시작됐다. 상소를 접한 광무제는 두 마리 말이 새겨진 마패를 보내며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한다. 명을 받은 이범윤은 청국관리의 횡포나 도적들의 패악질을 막기 위해 1902년, 개인이 모은 포수들의 부대라는 사포대를 조직했다. 간도를 지켜내던 이범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사포대부대원들과 함께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과 싸운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대한제국은 일본, 청나라, 러시아와의 관계 등, 요동치는 국제관계로 인해 1905년 5월, 이범윤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복종과 불복의 사이에서 수개월을 망설이던 이범윤은 700여명의 사포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옮기고 1906년, 연추의병부대를 창설했다. 이 의병부대가 의군부이다.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범윤의 부대가 의군부였다는 증거는 의군참모중장 안중근에게 있다. 안중근은 이 의병부대의 우영장(의군참모중장)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의병으로서의 의군부

이범윤은 연해주에 도착 후 지역 한인 사회의 유지이자 최대거부인 최재형을 설득, 의군을 위한 지원을 받고 직접 말 두 마리 마패를 근거로 의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을 시작했다. 무기구입과 군량미 조달을 위해!

군용을 갖춘 의군부는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평의원 안중근, 엄인섭이 맡으면서, 야전군 사령관으로 좌영장엔 엄인섭, 우영장엔 안중근으로 군대를 형성했다.

또한 이범윤은 친형인 주 러시아대사 이범진의 주도로 의군부대의 지원목적을 가진 동의회와 창의회를 결성했다. 동의회는 의군부와 하나라는 뜻이 있고 창의회는 의군부를 번창시킨다는 뜻이 있다. 하여 동의회는 의군부의 예하기관이라는 상징성을 보이기 위해 총장엔 최재형이 맡고 회장엔 이범진 대사의 아들이면서 헤이그 특사로 통역담당이었던 이위종이 맡았다.

이위종은 의군부 총재 이범윤의 조카로 주 러시아 대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부친에게서 받은 일만 루블의 군자금을 의군부로 가지고 와서 군자금을 지원을 위한 동의회와 군사충원과 인맥 지원을 위한 창의회를 설립하는 징검다리역할을 한 것이다. 창의회는 이범윤의 의군부대원이 3천~4천 명으로 늘어나게 된 배경이 된다.

의병으로서의 의군부의 활동

이범윤의 의군부는 1908년부터 먼저 척후대를 보내어 두만강 유역의 일본군 수비대의 동태를 파악, 동시에 철로와 전화선을 절단, 적의 통신을 마비시키는 등 1908년 7월에서 2개월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은 각각 100여 명의 의병을 인솔,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했다. 이때부터 1920년의 봉오동전투까지 이어진 함경도 진공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의군부대는 철도와 전선 절단,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 일본군 수비대의 건조물 파괴, 일본군 거주지역 점거, 일본군과 교전, 그리고 격파, 일본인이 점거한 어장 습격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 두 달 후, 의군부대의 일본군 섬멸작전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은 ‘폭도토벌대’라는 이름의 부대를 파견, 이 부대와 교전한 의군부는 인원이나 무기 등의 전력 차이로 패하여 러시아령으로 후퇴한다.

함경도 침공작전에서 일본군과의 큰 전력의 열세를 실감한 이범윤의 의군부는 요인암살로 그 전투방법을 수정했다. 그 방법의 수정에 결정적 역할은 일본의 압박에 의해 러시아와 청이 대한인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금지한 사건에도 있다. 전투를 할 수 없는 군대! 어쩔 수 없이 이범윤은 일본의 핵심 요인을 암살작전을 떠올렸다. 그것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 사건으로 결실을 맺는다.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등박문 사살로 성과를 내자, 이범윤은 류인석의 13도의군에 창의군총재로 참여한다. 의군부대가 창의군으로 변경 된 것이다. 이때 헤이그특사의 일원인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안창호, 홍범도 등은 동의원으로 참가한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에 강제합병 됐다. 이범윤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은 대외 홍보단체인 성명회를 조직하고는 당시 대제국들을 향해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의 부당성을 널리 알린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에 항의했고 러시아는 13도 의군의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 일로 성명회 뿐만 아니라 의병으로서의 13도의군도 해체된다. 의군부의 실제적 수장인 이범윤은 그 후 한 달여, 문창진의 밀고로 러시아에 피체되어 7개월간 수형을 살아야 했다. 출옥 이후 이범윤은 권업회를 창립하는 등, 여러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면서 일방으론 의군부를 재건하려 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일본과 연합한 러시아 당국의 독립단체 불허 정책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의군부 재건

그러나 1919년 1월 1일(음력 무오년)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찾자는 의병 아닌 민족국가로서의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대한독립선언(일명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대표자 39명 중 한 사람으로 동참, 서명했다. 그해 3월 1일, 독립만세의 불길이 전국에 퍼지면서 그해 3월과 4월 사이에 연동, 한성, 상해 등 지역에서 대한의 임시정부 칠팔 개가 세워졌다.

1919년 4월, 이범윤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가 의병 아닌 독립군대가 되어 다시 탄생하게 된다. 의군부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한 축인 서일의 북로군정서와 연계하여 새로운 전쟁을 준비했다.

1919년 9월, 동북아 전체에 흩어진 7~8개의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이 상해에 모여 통합 임시정부를 세운다. 국호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승만, 대한민국 최초의 법령은 이승만이 최고의 집정관이었던 한성임시정부의 법령을 기본법으로 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좌진이 총사령관을 있는 서일의 북로군정서와 지청천의 서로군정서를 묶어 대한군정서군으로 이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으로 편입한다. 당연 의군부도 대한군정서의 한 부대가 된 것이다.

의군부는 재창단 얼마 후 6개 대대로 편제를 형성할 만큼 그 세가 늘어났다. 그렇게 거대해진 의군부는 국토보존과 백성의 안녕을 애국의 최고가치로 삼게 되고, 총재 이범윤은 두만강일대에서 일경과 헌병을 공격하고 친일 한국인들을 색출사살을 명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국 동북군벌까지 사주, 동원하여 의군부를 공격하게 했다. 이런 저런 일로 의군부는 주간 아닌 야간활동을 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20년, 최진동의 독군부와 합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함경도 강양동 주재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최진동의 세거지인 봉오동을 점거한다. 그리고 발생한 일본군의 대한독립군 제거전쟁 청산리 일원의 전투.

그 전투에서 서일총재는 대한군정서부대를 셋으로 나눠 러시아 국경지역인 밀산으로의 후퇴를 결정한다.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장교들로 구성된 한 대(隊)는 비전투요원들인 가족을 보호하고, 각 부대의 총재단으로 구성된 한 대(隊)는 일본군 지원부대를 공격하여 독립군을 추격하는 일본군 본대를 돕지 못하게 공격하였으며, 나머지 각 부대의 사령관을 축으로 하는 야전군 부대는 독립군을 추격하는 일본군 본대를 돌파하여 밀산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의군부 역시도 이범윤의 총재부대는 총재단으로, 사령관 허일의 부대는 야전군으로 나누어졌었다. 그 두 부대의 전투는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군정서 군대가 청산리 일원에서 올린 혁혁한 전과는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십리평에서 시작하여 밀산으로 이어가며 승리한 대한군정서 총재부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거의 전무하다. 어떻든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가 하나로 뭉쳐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이룬 청산리대첩 당시 의군부도 같은 전쟁을 치뤘다.

그 전투 후 밀산으로 모인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쏘련파 빨치산들과 만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의용대(義勇隊)! 이 쏘련군 빨치산 의용대의 사령관들은 이미 쏘련의 지령대로 “대한민국의 독립은 쏘련이 시켜줄테니 대한독립군은 쏘련을 도와 러시아백군과 하나 된 일본군과 싸워달라”며 유혹했다. 거기에 하나 더 붙여 군대의 훈련과 신식무기제공이라는 허울 좋은 유혹을 앞세워 자유시로 모이라는 조건도 붙인다.

이미 간도를 잃은 대한독립군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유시로 이동하기로 하고~~!

자유시로의 이동을 포기한 의군부 본부대

블라디보스톡에서 자유시로 가는 중간지점인 이만에서 머리를 맞댄 대한군정서의 총재들과 사령관들은 러시안의 이중성과 일본군과의 독립전쟁을 치루기엔 너무 먼 거리 등을 이유를 들어 진퇴의 문제를 다시 의논했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에 속한 총재들은 자유시로의 이동을 고집하는 휘하 부대의 사령관들을 남겨두고 밀산으로 돌아갔다.

사천여명은 자유시로 가고! 이때 의군부도 자유시로 이동하자는 사령관 허위와 이범윤의 의견이 충돌한다. 그래서 밀산으로 돌아가는 이범윤 총재의 직속부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수백명은 사령관 허위를 따라 자유시로 이동했다.

밀산지역으로 돌아온 서일총재의 대한군정서 본부대는 당벽진으로,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자신이 세운 대한광복단을 다시 세우겠다고 하면서 영안현으로, 이범윤의 의군부는 추풍지역으로 그 본부대를 옮겼다.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에 의한 의군부 해체

이후 서일 총재는 자유시로 가는 동지들을 막지 못한 총재로서의 막중한 책임감과 토비들의 당벽진 공격에 젊은 동지들을 잃은 자괴감이 더해져서 자유시참변 두 달 후 자결로 순국했고, 김좌진은 10여년 후 자칭 김일성이라고 떠들던 공산주의 간도지부장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범윤의 의군부는 영안현에 본부를 두었고 서일총재 사후 이범윤총재가 대한군정서의 총재가 되지만 같은 영안현에 지부를 둔 공산당원들의 의군부 수시로 공격으로 더 이상 의군부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1922년 겨울 결국 완전 해체한다. 결국 동포로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대한 독립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 결과는 자유시참변 그 이후 독립군대는 숨어야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활개 치는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범윤 총재는 군대를 운영하는 대신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하며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들과 함께 한다.

결(結)

대한독립군의 역사를 보자면~~!

의병으로서의 의군부가 1906년에 간도사포대에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고 1908년 즈음에 한반도 내 의병들이 흩어지며 간도와 연해주로 유입되어 재편 되고 1910즈음에 신흥강습소가 생기면서 그곳 졸업생들이 세를 불리면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919년 1월 1일의 무오독립선언대회의 정신을 이은 3.1 만세혁명, 이후 3월과 4월, 각처에 세워지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부활, 9월 각처의 임시정부를 상해에 본부를 둔 통합임시정부 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임시정부 산하 대한독립군 설치와 자유시 참변을 통한 대한독립군단의 해체라는 수순을 겪는다.

자유시 참변이 그랬듯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한 독립운동의 종말에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있다. 우당 이회영 중심의 신흥무관학교가 핵심인 지청천의 서로군정서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나 모두를 아우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대종교의 대한군정서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나 모두 그렇게 공산군에 의해 종말을 맞은 것이다.

지청천 장군은 훗날 다시 재기하여 공사주의자 색출부대를 특무대로 설치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에 의군부가 있었고 의군부를 세운 1856년생의 이범윤 총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독립군 흥망의 역사를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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