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표 작가

 

“장독대는 각기 다른 모습들이 존재하는 小宇宙의 공간”

안창표 작가는 ‘장독대’를 이렇게 풀어냈다.

우주의 조화를 뜻하는 다섯 가지 색 중에 가장 중요한 색이라 할 수 있는 붉은색, 황색, 흑색 등이 우리 생활의 조미료가 되어 조화를 이룬다. 장독이 숨을 쉰다는 것은 나와 우리의 소통이고, 음식을 담는다는 것은 나와 우리의 사랑이며, 뚜껑을 덮는다는 것은 나와 우리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용서하는 것이다.

장독 속에는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보이고 둥근달이 보이고 내 얼굴도 보인다. 장독대 없이 민족성과 전통성을 논할 수 있을까? 장독대 없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까? 장독에서 느껴지는 형태미나 조형적 가치보다는 거기에 묻어 있는 삶의 정서가 지배적이지 않을까?

장독대는 우리의 삶을 가장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공간이다.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는 평소 동경했던 밀레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과 그림에 대한 표현을 찾고자 했다. 그 또한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이 자신의 삶과 동일해지기를 바랐다. 그것이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열망과도 같은 것이라 볼 때, 내가 다시 찾은 것도 결국 장독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장독에 대해 표현했지만 내가 바라보는 화폭의 장독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장독이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이고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정서가 화면을 지배하는 것이다. 어릴 적 많은 추억의 공간이 더욱 정감 있게 다가올 때,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화폭에 옮길 때마다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든다. 비가 온 뒤 장독 위에 고여 있는 물 위에 비친 풍경과 장독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은 항상 그곳에 생각을 머물게 한다. 민들레가 옹기종기 피어 있는 봄날, 비가 오면 “애야 장독 뚜껑 덮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여름날, 장독 위에 낙엽이 흩날리고 빨간 고추가 널려 있는 가을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서 포근하기까지 한 겨울날, 이런 이야기와 영감은 벌써 캔버스 위에 아름다운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고려청자처럼 귀족적이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서민적인 모습으로 소박한 자태를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온갖 풍파에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 나는 그 장독대에서 나와 우리의 삶을 발견한다.

안창표 작가의 작품을 ‘현대적인 감각에 순응하는 확장된 사실주의 미학’이라고 정의내린 신항섭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회화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인가. 이런 의문을 떨칠 수 없는 미술애호가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현대미학이 주도해온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실주의 미학은 박제된 미학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렇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적인 이미지가 새롭게 각광받게 되었다. 비록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는 할지언정 실제를 똑 같게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안창표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실적인 묘사는 여전히 현대회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의 교묘한 병립 및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극사실적인 묘사와 비구상 및 추상적인 이미지의 결합 또는 병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와 같은 형식의 작업은 그에게는 꽤 오랜 과제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이고 상반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공존케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극렬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하다. 사진을 능가하는 치밀하고 섬세한 사실묘사는 스스로의 재능을 시험하듯 그 극한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불현듯 추상과의 만남을 획책하게 된 것이다. 사실묘사의 극점에서 만난 추상세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다. 사실의 극점에서 추상이 시작된다는 조형적인 논리가 비약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작업이 말하고 있듯이 사실과 추상은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이보다 더 조화롭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추상적인 공간에 들어서는 극사실적인 이미지는 한층 극명하게 보인다. 여기에서 국면을 이끌어 가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사실적인 이미지이다. 추상을 통해 그 존재가치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키게 되는 조형의 변전이 놀랍기만 하다. 그가 오늘까지 이처럼 사실과 추상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심미안을 지닌 눈을 설득시킬 만한 미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과 추상은 상반되는 개념임에 분명하지만 한 곳에 놓였을 때 오히려 시각적인 긴장은 높아진다. 다시 말해 사실적인 이미지는 추상적인 이미지로 인해 그 존재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이는 어쩌면 상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상반되는 이미지와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조성하기는커녕 되레 서로간의 상승작용을 유도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는 이와 같은 조형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사실주의 미학을 보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최근 작업에서는 장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조형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흔히 질그릇이라고 하는 장 담그는 장독은 투박한 그 재질 및 형태로 인해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을 엿보는 상징적인 기물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장독은 한국인의 생활정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장독을 제재로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징성과 더불어 조형적인 다양한 변주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작업에서 장독은 소재주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구성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있다. 소재를 중심적인 이미지로 부각시키는 일반적인 구도와 달리 구성적인 요소에 국한시키는 것이다. 물론 장독 자체가 작품을 주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화면 가장자리로 밀어냄으로써 부수적인 소재처럼 보인다. 이는 그의 작업 자체가 소재를 중심적인 이미지로 내세우는 소재주의가 아님을 말해준다. 즉 화면 중심이 꽃이라든가 빗물이 흘러내리는 자국, 또는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채워지는 데 따른 구성상의 묘미를 주시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추상적인 이미지와의 조합과는 또 다른 사실과 사실의 조합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장독 이외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꽃이나 흘러내리는 빗물자국과 같은 이미지는 희미하게 표현된다. 선명한 이미지와 흐릿한 이미지의 조합이자 대비인 셈인데, 추상적인 이미지와의 조합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흐릿하게 표현되는 사실적인 이미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꿈과 같은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장독이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이고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정서가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희미한 이미지의 꽃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 시절, 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부추긴다. 우리가 잊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꿈과 사랑과 행복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장독의 형태미나 조형적인 가치보다도 거기에 연루되는 삶의 정서를 되살려내는 일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회화적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공간, 또는 여백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사실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현대미학의 수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의 접점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습속에서 탈피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감각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확실히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결코 과거 지향적이거나 복고적인 취향이 아니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설득력이란 다름 아닌 삶의 정서를 보다 풍부하게 가꾸어주는데 있는 것이라면 그의 작업은 이 같은 요구에 순응한다.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그 안에 은닉된 내적인 정서 및 의미를 이끌어내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독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업은 단순한 소재의 아름다움이나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을 양립시키면서 그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조형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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