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수의 '대한의 혼'

중용(中庸) 1장, 그것만 바로 알아도 천손사상 알 수 있다.

 

중용이란?

중용을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잡는 중심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중용 1장에서의 중(中)은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희로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라 하여 <희로애락이 아직 나오지 아니하는 것을 일컫고, (희로애락이 나오지 아니하는) 중의 모든 상태가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화(和)라 말한다>라고 하여 중(中)은 마음속 성품 상태를 말한다.

한문에서의 중(中)은 사방지앙(四方之央) 마음이라 했고 요임금이 기록한 죽간에서도 그 중(中)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또 용(庸)은 ‘쓰다, 공(功), ~~로 써, 상지(常之) 항상 용’이라고 기록되어 목적어로서의 쓸 용(用)과는 다르게 그 어떤 것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용(庸)이 된다.

그럼 결론은 간단하다. 中을 만들기 위한 쓰임새!

중용(中庸)은 상고시대부터 있었다.

중용은 독자적인 기록물이 아니다. 중용장구서에 첫째문장에 스스로 있어 상고시대부터 내려온(蓋自上古)것이라 했다. 둘째문장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양위 할 때 경(經)으로 보여 있는 것인즉 그 중(中)을 붙잡고 지키라(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용 이전뿐만 아니라 요순임금 이전에도 그 중용의 경전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입으로 이어진 상고시대의 경(經)까지!

그래서 중용은 중용을 읽는 법인 독중용법과 중용의 핵심을 해설한 중용장구서를 풀어야 그 목적을 따르는 그 뜻을 정확히 유추해 낼 수 있다.

‘중용이란 처음 배우는 자는 이해 못한다’는 글로 시작하는 독중용법에선 中庸之書難看 中間說鬼說神都無理會(독중지서난간 중간설귀설신도무리회)를 시작으로 하여 <중용은 읽기 어렵다 중간에 설명되는 귀신과 신의 이치를 바로 안 연후에 중용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또 많은 내용은 그 쓰임이 은밀한 것(費而隱)을 말하였다고 했다.

중용(中庸)은 마음사용설명서

중용장구서의 기록을 보면 ‘거룩한 신의 뜻을 이어받아 하늘의 끝자리까지 차지하라(聖神繼天立極)’에서 시작하여 인심(人心)도심(道心)성(性)명(命)정(精)을 앞세워 마음의 빈 영을 깨닳아 서(心之虛靈知覺) 마음을 다잡아 성(性)에 목숨 걸고 가려내 버릴 것을 버리고 찾을 것을 찾으라고 했다. 그것이 거룩한 신의 도(道) 즉 성신지도(聖神之道)이다. 중용(中庸)의 요구가!

필자가 올린 천지인 사상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보신 분이라면 그 삼진(三眞)의 법(法)인 성명정(性命精)의 원칙을 따라 사람들과 탁하게 부딛히고 다투는 감식촉(感息觸)의 본성을 버리기 위한 심기신(心氣身)을 발동하여 천신(天神)의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할 게 우리 천손의 의무요 사상이라고 한 말들을 기억할 것이다.

성(性)이란 악(惡)이 없이 선(善)만 있는 성품이요, 명(命)이란 언과 행에 불투명한 것이 없이 그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투명함을 보여주는 목숨이며, 정(精)이란 가볍지 않고 중후함으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는 쓿어 가려냄 즉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세 진리(眞理)의 법이요, 천부(天符)의 사상이며, 그 천부는 곧 홍익인간세상을 만들어갈 원리였는데 그 천부의 사상이 한문이 되고 글이 되어 경전으로 만들어지기 전, 아주 오랜 상고에서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 천부의 사상이 있는 배달의 문화와 공자(孔子)는 무슨 관계일까?

공자는 이족(夷族)이다

중용30장에 ‘중니 요술조순상률천시하습수토’라 했다. <공자는 조상 요와 순의 법과 문장과 문과 무를 따라서 위로는 하늘의 때를 따르고 아래로는 물과 흙의 이치를 이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 그의 조상은 요와 순임금이다. 그 요순임금의 민족에 대한 답이 맹자 이루장 하편에 있다. <맹자 가라사대 순임금은 저풍출생 부하에 거주 명조에 돌아갔으니 동이(東夷)사람이요 문왕은 기주출생 필영에서 돌아갔으니 서이(西夷)사람이다>

이것은 요순우탕문무임금뿐만 아니라 황제 헌원 그 이상의 인물들이 사는 곳만 달랐지 모두 이족(夷族)이란 말이 된다. 이족(夷族)은 기마, 유목, 활로 상징되는 우리 배달족의 이름이다.

“선함마음의 큰 활 삼아 과녁삼은 악한마음에 화살을 쏘아 ~~)<어아가에서>

이 활족의 의미가 역시나 사람의 본성에서 선한마음으로 악한 마음을 죽이는 민족이라 한다.

이족(夷族) 요순임금이 구전된 상고의 이치를 적어놓고 그들의 후손 공자가 정리한 글!!

공자는 원래 중화족(中和族) 아닌 이족(夷族)이었기에 중용에 대한 배움이 있었고 또 나름대로의 정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중용은 마음사용서명서

중용장구서를 기준으로 보자면 중용 역시나 마음에서의 성품을 천신의 요구 따라 만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행동을 좌지우지 할 의지로서의 마음 아닌 자기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인간적 자기본성 즉, 자신조차 다 알지 못하는 극한에서 올라오는 악한 자기본성들을 찾아내려는 전혀 다른 의지를 만들어내는 마음서용설명서!

그래서 중용장구서에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라는 말로 사람이란 성(性)명(命)지(之)정(精)을 따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위태롭고 생각은 미미하니 선별하는 그 생각 하나로 살아가라 한 것이다.

또 정(精)은 즉 무릇 두 가지 사이에서 잘 관찰하여 섞이지 않는 것이고 한 결 같으면 그 본심을 바르게 지켜 떠나지 아니하니,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한 몸의 주장을 삼고 인심이 매양 천명(天命)을 들어야 평안함을 찾는다고 했다. 이 역시 하늘의 볕이 되고 빛이 되어 타인의 마음을 부드럽게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줄 하늘 되는 본성의 의무(本心本太陽昻明)를 따름이니 역시나 천지인(天地人) 중 의지의 사람인 것이다.

이제 중용(中庸)의 바른 해석이 사람의 마음 속 성품에서 오직 자기중심적인 그 본성을 찾아내어 신의 요구를 따라 변화받기 위한 그것으로 해석해야 함을 이해하겠는가?

중용의 근본은 중용 1장에 있다. 그 1장을 제대로 풀지 않고 중용을 이해하자면 앞뒤가 꼬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게 한다.

그러하기에 1장을 우리 대한 사상을 중심으로 꼼꼼히 풀어본다.

중용 1장 중요부분 해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이 부분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의 대세는 “인간 본성은 선한데 악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이니 그 선한 본성을 일깨워 날마다의 삶에서 늘 학습하고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라고 하여 단순 선을 위한 인간의 의지만을 요구한다.

천부의 가르침을 기록하기 위해 만든 한문사전 옥편에서 천(天)에 사람이 자신의 머리 위에 둔 그 누구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물주(造物主) 진리(眞理), 성(性)에 천리부명(天理賦命)과 정질욕(情質慾), 명(命)에는 ‘명령, 걸어야 할 목숨’이라는 천신(天神) 중심과 사람중심의 두 종류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마치 땅 지(地)에 하늘을 대하ㅕ 대답하며 나아가는 땅(天地對)과 하늘을 모르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그 아래 또 땅(下也)가 있듯이! 또 도(道)는 ‘이치’라는 뜻을 기준으로서의 길이다. 하여 이 구절에서는 하늘의 명령엔 진리의 성품을 추구하며 그 방법을 따라 사람이 걸어야 할 목숨이 있고 또 그 진리를 늘 생각하며 자기 성품을 닦기 위한 자신교육이 필요하다 해야 한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막현호은 막현호미 고 군자 신기독야)

이 부분에서 많은 이들이 “어두운 곳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하여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야 한다” 등으로 푼다. 과연 맞나? 어두운 곳에서 잘 보인다는 것이나 미세한 것이 잘 보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이다.

이 문장에서 앞문구의 현(見)자는‘ 나타나다, 드러나다, 있다, 보이다.’ 등으로 자신이 한 일이 타인에 의해 들통 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타인의 평가가 동반되는! 뒷문구의 현(顯)자는 ‘영달하다, 나타내다, 드러나게 하다, 바깥, 표면’ 등으로 스스로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모양이다. 자기자랑을 위한!

그러므로 이 문장의 뜻은 사람의 본성은 모두 ‘자신이 찾아야 할 사람의 이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조물주로서의 하늘이 원하시는 참사람의 본문을 위한 열망이 자신에게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이 부분은 “희노애락을 나타내지 않음을 중이라 하고 절도에 맞는 행동을 화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고 화는 모든 것을 통달하는 것이다. 그 중과 화가 이뤄지면 천지가 제자리에서 편안하게 놓이고 만물이 이루어 진다‘라고 푼다.

치(致)는 자신을 의탁하는 정성이고 중(中)이 성품을 살피는 마음이다. 미(未)는 ‘아직 없다’는 뜻으로 ‘행동 이전에 올라오는 성품이 없다’는 뜻이 된다. 발(發)은 그 성품을 살피는 중(中)이 드러남이고 절(節)은 모든 사건마다에서 그 성품을 살피는 자신이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나 주목해야 할 단어는 언(焉)이다. 이 언(焉)은 ‘어찌 여기에, 의심쩍을 언’이라 하여 완료가 아닌 의문사다. 하여 중용1장의 마지막은 ‘그것은 어찌 될까?’로 귀결되었어야 한다.

<하늘과 땅은 어찌 자리하고 만물은 어찌 자랄까?>

이렇게 말이다. 아니면 언(焉)이 아닌 야(也)로 끝을 맺었어야 했고!

천부경(天符經)에서 마지막 열(十)인 인중천(人中天) 즉 사람가운데에서 하늘같은 존재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인 천(天) 둘인 지(地) 셋인 인(人)이 머리에 만들어지기 이전 상태가 무(無)이다. 그 무(無)의 뜻이 허(虛)이고 혼돈(混沌)이며 말하지 말라, 없다 등이다. 그 중 혼돈의 정의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라 했다. 뭔 말인가? 하늘도 사람 안에 땅도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 사람 안의 하늘과 땅은 그 진리를 따르는 그 성품을 위한 의지가 발현되지 않으면 혼돈이고 그 의지가 발현된 그 마지막에 비로소 그 하늘과 땅은 제자리를 찾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공자도 그렇게 정리만 했을 뿐 진정 그 천신이 바라는 성품을 완성한 천손의 결말을 다 몰랐다는 것이다.

그것을 천년이 지난 후 주자의 후예들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풀어 우리 배달민족의 천손사상을 배제시켰다. 그러하기에 이젠 다시 중용1장을 정리해야 한다.

중용 1장 <전체의 순서대로>

하늘 조물주의 명은 선한성품에 목숨을 걸라는 것이고, 그 선한성품을 만들기 위해 그 하늘을 따라가는 것을 이치라 하며, 그 이치를 따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닦아 나가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그 이치를 따라 진성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 이치에 이르름은 잠깐이라도 그 생각에서 떨어지면 불가한 것으로 천명솔성하려는 생각이 뇌에서 떠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옳은 것을 말하자면 군자는 그 성품을 살피기 위해 장소를 가림이 없이 삼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며, 어느 장소에서나 가르침을 받을 때 두려움들을 가져야 하는 것이구나!!!

천명솔성하는 모습이 타인들 앞에서 드러나지 않음은 (그 의지가) 숨어있기 때문이고, 드러내지 않음은 (아직 그 열망이) 작기 때문이다. 본래 군자란 그 홀로 삼가 진실하게 그것 천명솔성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사의 일로 발생되는 희로애락이 겉으로 표현되지 않게 된 마음을 중(中)이라 하고, 그 희로애락이 나오지 아니하는 중(中)의 모든 상태가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화(和)라 말한다.

땅의 일을 중심으로 사는 마음이 중(中)에 이르름이 하늘 조물주의 아래로 가는 큰, 전체의 바탕뿌리이고,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음에 이르름은 하늘 아래로 가는 이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성 다해 마음은 천명을 이루고 행동에서는 천명 따라 살아가면 하늘과 땅은 어떻게 자리하고, 모든 무리는 어찌 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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