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진 작가

“영구적 기운을 부여한다는 타투의 기원은 변하지 않았다”

노준진 작가
노준진 작가

 

‘나무는 타투이스트’하고 말하는 노준진 작가. 계속 들어본다.

타투(tattoo)는 종교적, 주술적 사상의 표식이었으며 신분의 상징 혹은 전투적 의지나 맹세의 발현이기도 했다. 정인(情人)의 이름 한 글자를 몸에 새겨 넣으며 영속과 귀속을 표상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나를 드러내는 외피적(外皮的) 수단으로서 장신구의 목적성과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으며, 문화와 예술로서 존재가치를 각인시키고 있다. 시간의 지배 혹은 자비 앞에 그 방법과 목적은 변화하고 분산되어 왔지만, 주체가 뜻하는 추상을 표현하고 그것에 영구적인 기운을 부여한다는 타투의 기원(origin)은 변모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타투가 영속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볼 때, 노준진의 작품은 방향성을 함께 한다. 돌은 변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물질이다. 영구, 영속, 무구의 상징인 돌의 시간은 인간이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우직하다. 태초부터 돌은 무겁고 진중한 주체로 흔히 묘사되어 왔지만, 작가의 섬세한 손끝에서 돌은 부드럽고 유려한 석조각으로 재탄생된다. 우둘투둘하고 투박한 곡선은 물론 매끄럽고 유연한 곡선까지, 인간이 쌓아올린 직선의 미학을 버리고 자연의 상징인 곡선으로서 작가 자신의 심상을 표현한다.

 

예술가는 본디 자연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노준진의 개인전 연작 또한 동물과 식물이 창연한 숲의 움직임이 선연하게 묘출되어 있다. 작가의 눈으로 동화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깊은 숲의 세계로 발길을 들여놓는다. 사락사락 잎사귀들이 볼을 비비는 소리와 청명한 수풀 내음을 느낀다. 하늘이란 캔버스 위에 저마다 다른 형상의 구름이 수 놓이듯, 나무는 잔가지를 손으로 삼아 수많은 형상의 잎사귀를 스케치하고 채색하며 대지를 채운다.

온갖 문양과 패턴을 그려 넣어, 숲의 외피와 진피를 눈부시게 가꾸어 놓는다. 작가는 코끼리, 물고기, 고양이, 기린, 낙타와 같은 동물로서 나무의 생명력을 조형하고, 그 위에 나무의 잎사귀들을 타투처럼 새겨 넣었다. 코끼리처럼 튼튼한 아름드리 벚나무는 벚꽃잎 타투로 사랑스러운 봄 내음을 부여받고, 바람에 휘감기는 버드나무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자연의 순환과 회귀를 내포한다. 이렇듯 작가는 자연에 자연을 새기며 영구한 자연에 대한 그 자신의 맹목적인 염원을 읊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간 노준진은 돌의 유무형적 틀을 깨고 쪼개고 다듬어 돌이란 주체를 석조각으로 치환해왔고 이로써 형형색색한 돌의 서사(敍事)를 수없이 써내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노준진의 이번 개인전 연작은 타투가 지닌 화석적 의미는 물론 변화하고 변주되는 또 다른 미래적 시도라 이를 만하다. 돌의 서사는 그로 인해 매번 새로운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리라 의심치 않는다.

예술가를 예술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든 소비하고 없애버리는 작금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고 남기는 것이리라. 유형의 자산으로서 작품을 남기는 것 못지않게, 사람들이 되새김질을 반복할 수 있도록 선연한 기억 한 가지를 새기는 것이 예술가의 소임일 것이다. 노준진의 이번 개인전 연작이 전시관을 찾은 누군가에게 짙은 무형의 타투 하나를 새겨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박정수 미술평론가는 노준진 작가가 이렇다고 말한다.

동양사상에서 세상만물은 자신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자연이 지닌 본질적 고유성은 특정의 상징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이 지닌 고유성은 완전성 보다는 불완전성이 강하여 이를 때로는 보강하고 때로는 비워주는 기운이 필요하다 하였다. 이를 두고 동양회화에서는 기운(氣韻)이라 하여 대상의 개성이나 기질, 생동감을 강조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노준진의 작품은 기운에 대한 조각의 운용 혹은 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물 그대로에서 사물의 상징성을 찾아낸 후, 사물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기하학적 선과 문양으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석조각의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내적 감성에 대한 상징성을 중심에 두고 있다. 돌 모양이 지닌 자연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마음에서 일어난 감성을 어떤 형상을 지닌 대상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는 조각의 특성과 사물의 재현이라는 회화적 특성이 결합된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석 조각 작품에 대한 접근은 돌덩어리에서 작가의 마음과 형을 조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노준진의 접근방식은 여기에 회화적 접근을 한번 더 투여한다. 자연 그대로의 사물의 외형과 여기에 자신의 마음에 숨겨진 조형적 특성으로 접근한다. 이것은 동양화론에서 말하는 형(形)과 신(神)에 대한 접근과 유사하다. 예술이란 어떤 대상 속에 숨겨진 정신을 찾는 일로서 신을 그리는 일이라고 말한 중국 동진 때의 화가 고개지의 전신(傳神)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노준진의 작품은 자연을 만든다기 보다는 자연의 근본을 그린다는 말이 더 합당하다.

따라서 이전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지난 전시의 ‘획(劃)’시리즈에서 한층 변화된 돌덩이와 관계 설정이 중요한 연결점이 된다. 지난 전시를 동양회화에서 말하는 선(線)과 획(劃)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서 돌에 숨어있는 형상을 찾아내기였다면 이번 작품들은 자연성 회복을 위한 이미지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에서 채취된 돌덩이에 대한 정신적 접근이다. 지금까지 그는 돌에 숨겨진 형을 찾아내기 위하여 동양회화의 획과 같이 망치와 정을 붓과 물감삼아 그림 그리듯이 조각하였다.

최근 작품들은 숨겨진 형을 찾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무한의 생명과 역사가 함께하는 무생명의 돌덩이 숨겨져 있는 자연을 끄집어낸다. 선과 문양으로 생명을 제공한 후 거기에 새로운 감성과 감정의 표현을 시도한다. 작품들의 외관에 무엇인가를 끄적이며 흔적을 남기는 일은 인간의 본능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파도가 막 쓸고 지나간 촉촉한 모래위에 기다란 막대를 들고 흔적을 남기는 풋사랑의 기억과도 같다.

기하학적 선과 문양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 자신에 대한 기록은 가로줄과 세로줄로 표현되며, 가로줄과 세로줄은 자연을 짜는 씨줄과 날줄로 전이된다. 검은 돌 위에 선을 긋는 행위는 자유로운 구성으로서 돌이라는 주제는 선의 출처가 될 뿐이며 자연을 찾는 시발점이다. 본질적으로는 자연이 지닌 무작위적 자연스러움을 통제하는 예술가의 감각이며 감성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단순화된 짐승의 위에 선을 그음으로서 대상의 형태를 명확히 하고 반복되는 그라인더의 행위에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

무엇처럼 생긴 돌에 흔적을 남김으로서 있는 그대로 모양에서 어떠한 형태를 찾고 거기에 선을 그음으로서 무엇이 완성된다. 돌덩이에서 얼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찾아낸다. 어렴풋한 형태를 만들고 정형화 되지 않은 수많은 선들을 그린다. 돌을 갉아내는 일이지만 불규칙한 선과 면으로 눈이 만들어지고 눈동자가 살아난다. 오래된 화석 암모나이트와 흡사한 형이 발견된다. 달팽이일수도 있는 형에는 각양각색의 선과 얽히고설킨다. 선이 뭉쳐지면서 눈이 되고 선이 흐르면서 살아있는 생물로 진화한다. 흐르는 원들의 흔적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새의 두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코끼리가 되고 코주부원숭이가 되었음 직하다. 카멜레온의 모습을 한 작품을 제외하면 선이나 기하학적 문양들을 특별한 긴장감을 지니지 않는다. 긴장감은 없으나 자연스러운 행위에 의한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안정적이다.

지금 현재의 작품들에는 이미 무엇을 지니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임을 알게 해 주는 연결자로서의 역할이다. 완전함을 갖지 못하고 있는 질료에 대해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하는 삶의 가치를 완성해 주는 멘토와도 같다. 상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었던 형태를 찾아간다. 기하학적 선과 문양은 어떠한 메시지를 제공하기 보다는 자연의 삶에 녹아 있는 인간 본성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노준진이 주장하는 자연성 회복과 자연의 가치가 발견된다. 역사를 품은 암석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초로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형을 찾아낸다. 말을 건내 설득하기 보다는 말을 들어주면서 고민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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