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작가

“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면서 마음의 위안과 삶의 활력”

 

이종우 작가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유년 시절 나의 모습은 항상 시골 언덕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겹쳐진다. 꼴을 베다 잠시 쉬며 휘파람 불던 그때도 소는 나와 함께였고, 엄마가 보고 싶어 나무 아래에 앉아 남몰래 눈물을 훔칠 때도 소는 내 옆에 있었다. 특히 늘 묵묵히 사람의 수고로움을 대신해 주는 누런 어미 소는 가족과 같은 존재로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쟁기를 등에 지고 미루나무 사잇길을 지나는 누런 어미 소의 눈빛과 발걸음은 어제 본 듯 기억 속에 선명하다.”

“가끔 마주친 어미 소의 눈빛은 먼 곳 저편에 시선을 두고 있어 상념에 잠겨있는 듯하여 덩달아 어린 소년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가느다란 달이 뜬 먼 하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다. 때로는 풀밭에 엎드려 되새김질하는 소를 바라보며 막연하게 어딘가를 동경하기도 했다.”

“나에게 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면서 마음의 위안과 때로는 삶의 활력을 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를 시각화하여 사람과 공존하여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에 담고 싶었다.”

다른 노트에는 이런 글이 놓여 있다.

“가을 아침 길거리 꽃집에서 만난 꽃 무더기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다양한 색과 향기에 잠시 아찔함을 느끼며 아련해진다. 새가 노래하고 벌과 나비가 꽃향기와 해후하는 사소한 날갯짓이 빨강, 노랑, 초록 갖가지 색채로 범벅이 되어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던 그 날의 기억. 잠시 색채는 붓끝에서 발가벗겨지고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제 막 페인트칠을 끝내 깨끗하고 규격에 맞추어 정비가 잘 된 고급주택 가의 쌈박함보다는 녹슨 함석지붕이 너덜대고 군데군데 지저분하게 얼룩진 벽면의 낡은 흔적 속에서 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더 진하게 느낀다. 불그스레 녹슨 레일과 검은 침목 사이 잡초 속에 당당히 핀 들꽃이 주는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나는 마음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현대인들은 때때로 화려하게 포장하여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풍요로운 삶이라 착각한다. 화려한 아름다움은 물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화려함 뒤에 감춰져 주목받지 못하고 찌그러지고 낡은 풍경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분노를 느끼게 하는 정신적인 삶의 영역을 만든다. 나는 현대인들이 화려한 아름다움에 취해 도덕적인 분노가 마비될까 염려스럽다. 아름다움의 세계를 얻는 대신 도덕의 세계를 잃었다면 결코 풍요로운 삶은 아닐 것이기에.”

 

시인 제갈양은 이종우 작가를 이렇게 읊었다.

오랫동안 얼굴 연작들을 통해 인간 본성을 심층적으로 탐구해 온 서양 화가 이종우가 최근 몇 년 동안 소를 대상으로 한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그의 소들은 기존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역동성이나 사실성이 철저히 배제된다. 또한 상당수 작품에서 소와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있다. 심지어 소의 등에 누워 평화로운 시간들을 공유하는 경우도 많다. 작가의 작품 생애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자 획을 긋고 있는 소는 어떤 대상이며 존재일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작품 생애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나는 30여 년간 작가와의 교류를 통해 그의 작품들을 넌지시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은 ‘사람-자연과 동물-소-소와 사람’으로 옮겨 간다.

사람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로 얼굴이다. 혼자 등장하거나 둘, 혹은 셋, 넷이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그들 대부분은 일상에서 온갖 풍파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이다. 성별과 연령에 있어 가능한 모든 조합들 속에서 작가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 군상의 온갖 정서들을 발견한다. 그 기저는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따뜻한 희망이며, 작가의 메시지는 늘 거기로부터 출발했다.

그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인간 삶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동물에게로 다가간다. 평소 쓰지 않던 진한 청록의 색채들은 인간 삶의 바탕이 자연으로부터 왔음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거기에 깃들어 살고 있는 동물들 또한 작가에게는 우리 인간이 닮아가고 추구해야 할 근원적 지향을 보여준다.

작가의 따뜻한 내면과 지향은 인간, 자연, 동물에서 이들 모두의 본성을 닮아 있음직한 소에게로 집중된다. 소는 역사 이래로 농경민족인 우리의 삶에 가장 끈끈하게 연결된 동물이다. 소가 지닌 우직함과 성실함, 그리고 천진난만함과 다정함의 정서들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 동안 고단하게 걸어온 우리들 삶과 항상 동행해온 시간들이 만들어 낸 상징이다.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든 시대이다. 한 주 뒤의 상황조차도 예견이 쉽지 않은 복잡한 물질문명의 시대이다. 어쩌면 오늘의 위기는 그동안의 인간 삶이 토해낸 수 많은 불확정성들이 만들어 낸 결과일 수도 있다. 단 한 순간도 진정한 쉼이 쉽지 않은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를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할 순간이다.

그럴 때 소를 떠올려 보라. 미루나무가 바람에 일렁이는 언덕들 위로 소를 끌고 가는 소년과 그들 뒤를 불그레하게 비춰주는 저녁놀! 비록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일망정 배가 부른 현재에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한 명장면이 아닐까? 우리는 어느 순간 너무 멀리에 와 버렸다. 과거의 단순했던 일상이 최고의 명장면이 되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그 순간을 떠올릴 순 있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서 소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 공간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겠다.

작가의 경험 속에서도 소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친구같은 존재였다. 이것은 농촌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 정서라 할 만하다. 그러나 소에게서 현재의 삶이 상실한 가치들을 떠올릴 때 이것은 새로운 상징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작가가 그의 생애 전부를 걸고 추구하고 지향해 온 인간의 길이며 자연의 길이기도 하다. 희망과 평화, 그리고 공존! 그의 화면이 수없이 반복되는 거친 무두질 속에서 오히려 따뜻하고 부드럽게 살아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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