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풍국 대한민국명장

“원목 나이테 상감門은 내 ‘나무 인생’ 최고의 結晶體”

 

햇볕 맑은 토요일 오후 인천시 십정동에 위치한 ‘명장창호공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향긋한 나무 냄새가 상쾌하게 온몸을 자극했다.

바로 가풍국(賈豊局) 대한민국명장이 각종 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업장이다. 가 명장은 2004년 목재창호 부문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되었으며 국내외 현장에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펼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창호는 못이나 접착제의 사용 없이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견고하고 뒤틀림이 없이 아름답게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는 특징이 있다. 장식을 안 한 듯 장식하고, 전체적인 비례감을 중시하며 공간의 변화에 따른 율동감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과장과 허식이 없는 것을 최고로 인정하는 미적(美的)인 기준이 바탕에 자리한다.

충남 서산 출신인 가 명장은 어려서부터 목공업에 관심이 많아 ‘나무’를 갖고 노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청소년 시기를 보낸 후 19세에 서울로 올라왔고 군대 제대 후 본격적으로 목공(木工) 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결혼 후 인천으로 이사해 현재까지 50년 하고도 수년을 더해 한곳에서 살고 있다.

가 명장은 전통 목재창호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 전통 창호 최고수인 무형문화재 김순기 선생(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을 찾아가 문하생으로 기술을 배웠다. 당시 엄격하고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김순기 선생의 밑에서 2년간 묵묵히 맡은 소임을 다했으며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스승으로부터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던 수료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스승의 가장 큰 선물이었던 것이다.

 

2004년 목재창호 대한민국명장 선정…국보급 문화재 복원·보수 참여

그리고 28살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 일본 현지 회사에 입사,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본 전통 목재창호 기술을 익힐 수 있었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인 직원을 휘하에 둔 반장 직책도 거뜬히 완수했다.

일본 전통 목재 창호 기술은 문이 아래위로 열리고 닫히는 것인데 이때 익힌 기술은 지난 2017년 대전에 있는 옛 경무대 공관의 일본식 창호를 복원할 당시 국내 기술자가 없자 시공사 측이 전국을 샅샅이 수소문한 끝에 가 명장에게 연락이 닿아 겨우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6년 이란 팔레비 국왕 별장 공사에 1년간 참여했으며, 이라크에서도 1년간 일본과 영국 출신 직원들을 관리하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또한 선진국 기술자들이 참여한 인도 왕국 복원사업에도 책임자로서 현장을 이끌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던 추억을 회상했다.

가 명장은 “다양한 외국 현장에서 각국 작업자들을 지도하며 깔끔해서 임무를 완성할 때 마치 내가 대한민국 대표 선수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 같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경복궁 경회루(국보 224호), 광화문, 경희궁, 창덕궁, 운현궁, 옛 서울역사(驛舍) 등 국보급 문화재의 보수·복원 공사에 참여했으며 이화장(이승만 대통령 사저), 경교장(김구 선생 사저), 음악가 홍난파 가옥, 민병옥 가옥, 인천우체국(현 인천중동우체국) 등의 보수·복원과 인천 송도에 있는 경원재앰배서더(한옥 호텔) 신축 공사 때 창호 제작을 맡았다.

이란 팔레비 국왕 별장 공사 등 다양한 외국 경력 쌓아

특히 가 명장은 평생을 ‘나무’와 함께 한 집념과 연륜, 기술과 경험 등이 총 집합된 ‘원목 나이테 상감문(門)’을 완성하여 발명특허를 받았다(제0436520호). 꿈속에서 문양을 보고 10년 만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의 핵심은 다채로운 원목 나이테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배치해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 것으로 견고함도 강해 절대 뒤틀리지 않고 영구하다는 것이다.

‘원목 나이테 상감문’은 가 명장이 우리나라 나무의 아름다움을 알고, 나무의 근본을 이해하며 나무와 교감하면서 탄생시킨 그야말로 ‘걸작(傑作)’인 것이다.

1972년 건축목공기능사보 자격 취득, 1997년 건축목재시공 기능장 시험 합격, 2000년 인천시 신지식인 선정, 문화재 소목장(2834호) 등록 등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는 가 명장은 한반도에서 서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나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

그래서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100가지 나무들의 표본을 전시판 형태로 제작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 나무들’이라는 교육용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산림청 산하 목재박물관과 산림기술연수원 등 10여 곳에 전시되어 있으며 한양공고와 인천어린이박물관 등에도 기증·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가 명장은 “후손에게 우리의 나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나무는 사람에게 고마움 자체인데 점점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도 있다. 평생 목수를 했는데,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고 우리 나무의 소중함과 자연보호 정신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가 명장은 나무 표본 전시판을 제작하기 위해 산림청에 자문하고, 우리나라 산과 들판에 자생하는 나무들을 찾아 다녔으며 이렇게 수집한 나무 표본들이 공방 창고에 고이 보관돼 있다. 필요한 기관이 있으면 전시판으로 제작해 보급할 것이라고 한다.

“아들이 대 이어줘 감사…후진양성에 남은 인생 바칠 터”

가 명장의 부친은 한학자(漢學者)로 지역에서 유명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서당에서 논어 맹자 소학을 전부 외울 정도로 한학 실력이 탁월했던 가 명장은 가세(家勢)가 기우는 바람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개인사가 아픔으로 남아 있던 가 명장은 53세에 검정고시로 중졸 자격을 얻었으며 55세에 인천시 최고령으로 고졸 자격을 얻어 대학에 진학해 59세에 성화대학 건축과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가 명장은 “나이 50살이 될 즈음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었나 생각하니 가슴이 허했다. 마음의 병이 커질 무렵 고입 검정고시에 응시하려고 지하 작업실에서 공부했다, 한마디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 맘만 먹으면 다할 수 있다는 엄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가 명장은 “평생을 올곧이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 창호기술을 계승·발전시키고 문화재 복원, 우리 나무 보존 등에 미력하나마 이바지한 점이 보람되고 자랑스럽다”며 “목공분야 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 향후 소원이자 목표”라고 밝혔다.

특히 자신의 업(業)을 대를 이어 하고 있는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 목공업의 대를 잇는 아들이 정말 고맙다”며 “기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대우가 개선되고, 전통 창호를 배우려는 후진들이 많아지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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