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내 안에 있다. 고로 내가 하늘이다.”

國天 김하곤 선생

 

‘神人合一’된 弘益人間들이 만든 지상천국 理化世界

신이 무엇인가? 아무리 말한다고 해서, 외운다고 해서, 그리고 많은 종교에서 믿는다고 외친다고 해서, 자기만족일 뿐 신을 알 수는 없다. 신을 안다면, 깨달음은 고속도로에 진입한 것이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신을 처음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에고(ego)도 같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만난다면 깨달음의 길은 스승 없이도 혼자도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다고 믿는다. 고로 나는 신을 만나게 하고, 신을 만날 때까지만 안내한다. 나는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신에 대해 이렇게 접근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부정적 의미의 무당들을 보고, 혹 빙의(憑依)들을 볼 때가 있다. 이해 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를 접할 때가 있다. 그러면 긍정적 의미의 그 반대쪽의 신들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신은 당신들의 에고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답은 나와 있다. 에고 때문에 신을 알 수 없다면, 에고를 알고 문제를 찿아서 해결하면 된다. 그럼 에고는 무엇인가? 학술적 다른 말로, ‘자아’라고도 하고. 사전적으로 풀어 말하면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라고 나와 있다. 필자가 간단히 말하면, 여러 조건에 의해 내가 만들어낸 나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습관 성격 모양들을 보고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더 쉽게 말해, 당신의 조건에 대해 만들어진 당신 아바타를 보고 나는 당신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갑돌이도 되고, 갑순이도 되는 것이다. 그 갑돌이와 갑순이는 영겁을 순탄하게만 살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척박한 지구의 환경에 의해 ‘존재’를 목적으로 살아왔기에 대우주의 법칙에 상반되는 카르마, 업장(業障)을 짓고 살아왔다. 여기에 부정적인 마·빙의들이 관여했다. 그들은 존재의 방법을 그릇되게 유도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죄는 인간들이 짓지 않았다. 죄는 신들이 지었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카르마, 업장을 생산해 내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존재의 방법으로 사과를 따 먹게 한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가 존재의 방법을 달리해야 할 이유다. 나는 존재의 방법을 달리 하는 것을 ‘후천(後天)’이라 말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 많은 성인들이 왔다 갔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나의 이 작업도 그 선상 위에 있다. 존재의 방법을 달리 하는 것, 즉 ‘후천’을 여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이것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르마, 업장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풀려서, 밝아지면 누구나 저절로 신을 알 수 있다. 밝아지면 보이기 때문이다. 나를 어둡게 하는 것은 카르마, 즉 업장이기 때문이다.

‘에고’를 나쁘다고 정의하면 안 된다. 내가 만들어낸 나도 나다. 보통 ‘가아(假我)’라고도 말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고 본다. 하지만 편의상 ‘가아’라고 말하겠다. 에고도 나다. 고로 어두운 에고를 변화시키어, 밝게 하면 된다. 나의 에고가 어두운 카르마 업장으로 만들어졌다면, 밝음으로 변화하게 하면 된다. 이것은 바로 성경의 나(에고)가 거듭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보통 카르마 업장들은 몸(육)에 기억되어 있다. 몸에 기억된 정보에 의해 에고(가아)의 성향이 된다. 이 어두운 에고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은 정보로서만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여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실시간 다 읽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작업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한다. 에고도 에고의 방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필사적이다.

“병은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이기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럼 이 부정의 에고를 어떻게 이기어 내어서 변화시킬 것인가? 많은 철인(哲人)들이 ‘나를 이기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에고(가아)다. 에고를 이기라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말하면, 이기어 내라는 것이다(이기는 것≠이기어 내는 것).

그럼 에고의 실체를 먼저 느껴보자. 서로 마주 앉아 상대의 눈동자를 평상시처럼 마주쳐 보자, 이때 껄끄러운 거북함을 느끼면 그것은 에고의 작동이다. 다시 눈동자를 사랑의 웃는 눈동자로 하여 상대의 눈동자를 마주쳐 보자. 전과 다름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참나’의 작용이다. 구별하여 느껴봄으로 에고(가아)와 참나의 작용을 구별할 수 있다. 3명만 모여도 장사한다는 중국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눈동자가 웃지 않는 자’와는 거래를 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필자가 하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럼 그 에고를 어떻게 이기어 낼 것인가? 다시 말해서, 나(에고)를 어떻게 이기어 낼 것인가?

간단히 말하겠다.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즉시 하라“이다. 양치(讓齒)해야 한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양치하고,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청소하고,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운동하고,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만나고,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생각이 올라올 것이다. 그러면 모두 즉시 행하라. 하루 종일 아주 빈틈없이 바쁘게 올라 올 것이다. 아주 피곤할 것이다. 그것을 모두 다 즉시 행하라. 한 달만 하면, 아주 쉬워질 때가 온다. 빠른 사람은 1주일만 해도 느낄 수 있다. 그때 느끼게 된다. ‘과거에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지? 그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었잖아. 허상이 나를 힘들게 했구나. 나를 속였구나. 물리적인 현실의 힘의 내가, 아주 힘없는 허상에 속았네, 아주 힘없는 것이 나를 속여 통제하였구나’를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 허상의 힘에 통제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나를 이기어 낸 것이다. 에고는 힘을 잃는다. 들켰기 때문이다.

부정의 에고는 속이는 속성을 지녔다. 상대가 살짝 말을 비틀어 속이려 한다면, 극히 에고적인 사람이라 생각해도 된다. 부정의 에고는 속이는 귀신이다. 그 속임수는 너무 완벽해서 인간은 구별하기 힘들다. 당신은 그 속임수를 알아낸 것이다. 에고는 드러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당신에게 들킨 것이다. 고로 당신은 자기를 이기어 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그것을 당신은 한 것이다. 당신은 이제 부정의 에고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다. 에고의 속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달 만에 한 것이다.

자 이제 나의 카르마,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을 말하겠다. 카르마, 업장이 부정의 에고를 만든다고 말했었다. 업장소멸은 공덕을 많이 쌓아야 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를 인지하여야 한다. 나의 마음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서, 아주 아름다운 밝은 환의 마음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하면 나의 어두운 업장이 내 몸에서 뱀처럼 꽈리를 틀고 있다가, 환의 밝음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튕겨 나간다. 튕겨 나간 만큼 밝아진 것이다. 나는 나의 몸에서 업장이 물리적으로 튕겨 나가는 것을 확인하면 그만큼 나도, 세상도 밝아졌다고 믿는다. 내가 밝아져야 세상도 밝아진다는 말과 연결된다. 세상을 밝게 한 만큼, 나의 공덕도 저절로 쌓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쌓여 세상은 밝아지는 것이다. 빛의 후천을 여는 것이다. 천부경의 ‘본심본 태양이 앙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태양을 뜨게 하는 키(key)이다.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를 가벼이 보면 안 된다. 이렇게 인지하게 되면 나의 에너지장이 바뀌고, 세상의 에너지장도 바뀌게 된다. 변화가 시작된다. 카르마와 업장이 소멸되면 내 안의 참나, 즉 밝은 ‘환빛’의 신성이 몸의 어두운 에고를 밝게 변화시켜서 투명하게 한다. 환(桓)의 신성이 몸을 뚫고 투영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안의 신성이 물리적인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다. 이때 육(肉)과 신성(神性)이 합쳐진 것이, 이 문의 주제인 ‘신인합일’인 것이다. 내 안의 신성, 즉 하늘이 육을 통해. 즉 물리적으로 물리적인 세상에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출현을 의미한다. ‘에고의 육’에서 ‘영(靈)의 육’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영육’으로 변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매미가 껍질을 벗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영육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제 ‘신인합일’된 상태를 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내가 하늘임을 증명하려 한다(人乃天). 이것은 언어의 한계성을 가진다. 아무리 불경 성경을 외워도 닿지 않는 것과 같다. 나의 안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해 왔던, 신(하늘) 즉 나의 발걸음의 방향 및 속도를 조절하고, 빙빙 돌리고, 가야 할 곳을 안내하고, 나와 태어날 때부터 같이 했던 신(하늘),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예약되었던 신(하늘)을 증명 하려고 한다. 당신 안에도 있는 신(하늘) 말이다.

문(文)의 서두(序頭)에서 말한 신(하늘)을 물리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당신이 이것을 알면 당신은 이제 스승 없이도 당신의 길을 갈 수 있는 변곡점이 되리라고 믿는다. 문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신을 만날 때까지만 안내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안의 신성(하늘)은 물리적으로 나를 움직인다. 나는 나와 내 안의 신성(하늘)을 분리하여, 신성(하늘)을 보여 준다. 당신 안에도 있는 신성(하늘)이다. 이것은 보아야지만 인지함에 확신이 가게 된다. 30년 도를 한 번에 깨달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 주는 것으로 말하려고 한다.

그럼 ‘신인합일’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사랑을 저절로 하게 되는 자를 ‘신인합일’된 자라고 말하고, ‘홍익인간’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홍익인간들이 모여 만든 세상을 ‘이화세계’라 말한다. 이 이화세계는 나의 이 모든 것의 여정의 끝이다. 고로 목적이다. 이 목적은 ‘지상천국’이다.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는 것이다.

그럼 이화세계, 즉 지상천국은 무엇인가? 나는 일찍이 경험하였다. 나의 촉이 완전히 바뀐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나다. 나는 이유없이 선물을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이유없이 행복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경험으로 하늘은 인간을 몸만 세팅한 것이 아니라, 행복도 같이 세팅 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가슴의 자신감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자신감으로 터질 듯이 꽉 차 있다. 잠을 잘 때는 어릴 적 내일의 소풍을 기다리듯이 내일을 기다리면서 잠들게 된다. 그리고 머리와 몸도 무척 시원하다.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 이화세계는 나의 밖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여 밖을 보지 말고 내 안을 보라고, 나는 혼신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화세계이다. 나는 약 10일간 이러한 것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나는 상상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경험해 보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구현하러, 지구에서 영겁(永劫)을 윤회(輪回)하면서 살아왔고, 작금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서 있다. 우리는 역할자이자, 사명자들이다. 고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성지다. 우리는 작금의 세상의 잣대로 보면, 초라해 보이지만 위대한 자들이다. 이 ‘위대한 자’라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외로운 길을 가야만 하였던 자들이다, 이 거룩하고, 위대한 작업에 영광스럽게 관여한 자들이다. 우리 모두 이화세계에서 만나기를 기원한다.

이 밤이 지나면 지구장의 에너지가 한 뼘만큼 상승할 것이다. <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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