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만 대한민국명장

確固한 信念으로 갖은 逆境 克復…2021년 금탑산업훈장 수훈 快擧

 

어머니는 베개 속에 감춰둔 꼬깃꼬깃한 50원짜리 지폐를 꺼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배곯지 말고, 몸조심하면서 윗사람 말 잘 듣고 열심히 배워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유난히 몸이 약했던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어머니는 옷소매를 적신 눈물로 마음을 전했다. 1976년 6월 대전의 계룡공고(현 계룡디지텍고) 3학년인 박정만 대한민국명장은 고향인 충북 보은을 떠나 경남 창원에 있는 통일산업(현 S&T중공업)에 실습생 신분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박 명장이 통일산업에서 산업역군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당시 학교 교감의 인솔(引率)로 다섯 명의 학생이 면접을 보러 갔는데 회사 관리부장이 자신의 회사는 보일러 자격증은 필요 없다고 2명을 탈락시킨 것이다. 그중에 박 명장이 포함됐다. 회사 정문을 들어서며 ‘이곳에서 내 꿈을 펼치리라’ 다짐했던 박 명장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순간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학업과 병행하며 신문 배달을 할 때 만났던 선생님께서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정만아, 네가 하고자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길은 있다”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걸 느꼈던 박 명장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간다면 정말 영원한 못난 놈이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관리부장에게 자신의 집안 사정과 학교생활, 그리고 회사에 들어서며 한 각오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길이 다시 열렸다. 관리부장은 당당하게 자신의 각오를 얘기하던 소년 박정만을 받아준 것이었다.

 

“절박함과 끊임없는 노력이 자신의 목표 완수 秘決”

하지만 회사생활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기계공고 출신은 입사와 동시에 기계를 배정해 주었지만 밀링반에 배치된 박 명장은 밀링가공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기계를 만지지 못하게 했다. 박 명장은 다시 스스로 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 후 야근조가 출근하는 오후 8시30분에 다시 출근하여 ‘선배’가 작업할 때 다듬질을 도와주고 기계 청소도 해 주며 기술을 익히고 밤 12시30분에 퇴근했다가 다시 새벽 5시에 출근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니 전국 각지에서 온 명문 공고 출신들보다 기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박 명장이 말하는 발전의 키워드는 ‘절박함과 노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당위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보다 한 번 더 실행하는 성실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명장의 성실함과 집중력은 학창시절부터 유명했다. 고교시절 ‘유마(維摩)불교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교사들의 구두를 닦아주고, 대전 보문산 송학사로 이동하여 예불을 드리며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했다, 일요일 아침에는 대전역 광장을 청소하며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인해 신문 배달 일도 병행해야 했다.

신문 배달은 박 명장 인생에 ‘업적’이 되었다. 첫 달에 50부로 시작했는데 보수가 만족스럽지 못해 ‘3개월 안에 부수 3배 늘리기’ 목표를 세우고 비가 오면 신문이 젖지 않도록 직접 전달하거나 비를 피해 놓아 주었다. 궂은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약속된 시간에 신문을 배달해 준다는 소문이 퍼졌고 보던 신문을 바꿔 박 명장의 ‘신문’으로 신청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도 했다. 그 결과 목표를 두 달 만에 달성할 수 있었으며 지국장은 특별포상을 하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사건(?)이라고 박 명장을 칭찬했다.

“가족은 내 삶의 원동력…아들은 가장 아픈 손가락”

박 명장은 1981년에 결혼해 슬하에 2녀1남을 두고 있다. 사실 박 명장에겐 ‘아픈 손가락’이 있다. 막내아들이 3살 때 열병에 걸려 언어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일곱 살 때 1형 당뇨 판정을 받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당시 박 명장은 직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었으나 아들의 병수발을 들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 토·일요일과 공휴일에는 도로에서, 그리고 평일 저녁에는 시청광장에서, 축제 기간 주말에는 경남 창녕에 있는 화왕산에서 뻥튀기와 음료를 팔아 병원비와 약값을 충당했다.

회사에서는 박 명장의 열정과 성실함에 변함이 없었기에 이런 사실을 당시 동료들은 알지 못했다. 박 명장은 “아픈 아들이 나를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며 병을 고쳐주기 위해 전국의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녔고 지금까지도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새로운 의료기술 관련 동향을 확인하고 찾아다니고 있다. 박 명장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아픈 자식을 알려 치료방법을 찾아 고쳐주는 것이라고 한다.

박 명장은 1977년 2월부터 2013년 12월 31일 파트장으로 정년퇴임 하기까지 35년을 꽉 채워 근무했다.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오직 한 직장, 한 직종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제1인자가 되자’는 인생철학을 갖고 있는 박 명장은 단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불굴의 도전정신과 희생, 봉사정신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입사 3년째가 됐을 때 품질경영팀 어느 대리가 박 명장의 인생항로(人生航路)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박 명장은 다양한 제안 활동 및 품질분임조 활동을 열심히 하는 ‘제안왕’이기도 했는데 ‘품질명장’을 목표로 활동을 심화(深化)하자는 것이었다. 회사 모든 사원을 대상으로 뜻을 같이할 10명을 선발해 하나의 목표와 한뜻으로 뭉쳐 ‘선봉분임조’를 결성하였고, ‘선봉분임조’는 회사의 문제점을 공동으로 해결해가며 경남 품질경영대회에 여러 차례 출전해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기술연마와 현장 개선 활동에도 불구하고 IMF사태로 몸담고 있던 당시 통일중공업은 결국 부도(不渡)를 맞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오고 현재의 최평규 회장이 인수하면서 박 명장의 경력은 계속될 수 있었다.

박 명장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꿈을 이루기도 전에 회사의 부도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까지 왔지만 새로운 경영진으로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며 당시 새 경영진 중 한 간부가 품질명장만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대한민국명장’을 목표로 기술을 연마하라는 얘기를 듣고, 2005년부터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한민국명장’에 도전하게 된다.

2007년 생산기계분야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2021년 ‘금탑 산업훈장 수훈’

박 명장은 밤잠을 푹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늘 현장의 문제점을 찾고 개선 방안을 고민했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고민과 해결의 노력은 회사의 성과로 이어졌다. 낮에는 회사 현장에서 성과를 냈고, 퇴근 후에는 개인의 기술 자격증 취득을 위한 시간으로 채웠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5년에 수치제어 밀링기능사 및 선반기능사 자격을 도강(盜講)으로 취득하고, 2006년에는 기계가공 기능장이 됐으며 ‘창원최고근로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생산기계분야에서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다. 2008년에는 직업능력 개발교사 자격취득 및 직업 진로지도 교수기법 수료, 2012년 도요타 생산방식 현장 감독자 연수 및 산업안전 관리자 교육 30회 수료, 2015년과 2021년에 기계분야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로 선정됐다. 그리고 사내·외 개인 및 단체 표창을 68회 수상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에는 ‘금탑산업훈장’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박 명장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목표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되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혼자서 못하면 협력하여 같이하면 되고’.

박 명장은 이것을 ‘되고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마침내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박 명장이지만 사실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되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기술연마에 최선의 다해 온 쇠털 같은 시간이 박 명장의 삶에 촘촘히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괄목(刮目)할만한 쾌거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 명장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고 말한다. ‘되고의 법칙’을 얘기하는 박 명장은 매 순간 방법과 길을 찾는 선택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 명장은 현장에서의 경력이 쌓여가면서 학업에 대한 갈증도 더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50세에 학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2006년 한국폴리텍7대학(창원) 기능장과정(2년)을 시작했고, 2012년에는 심화과정(2년)에 들어갔으며 2017년에는 경남대 산업대학원 기계공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지금도 은사(恩師)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는 박 명장. 그 주인공은 바로 김화정 한국폴리텍7대학 창원캠퍼스 교수다. 2005년 하반기에 전공과 관련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박 명장은 무작정 학교로 가 수업을 들었다. 도강(盜講)이었다. 이때 김 교수에게 박 명장은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김 교수는 당시 박 명장에 대해 “확고한 목표의식과 끊임없는 노력이 감동적으로 다가 왔다”며 “특히 늘 사원복을 입고 강의를 듣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와의 만남은 대한민국명장을 준비하던 박 명장에게 소중한 인연이었고, 김 교수는 지금까지도 박 명장의 적극적인 후원자이기도 하다. 박 명장은 김 교수와의 인연으로 S&T그룹 회장을 통해 한국폴리텍7대학 창원캠퍼스에 장학금 1억원을 쾌척(快擲)하기도 했다.

“살아 숨 쉬는 그날까지 技術報國위해 사회봉사”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박 명장은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자격은 기회를 만든다”면서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책임감 있게 역할을 잘 수행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고 말한다. 이어 “나 역시 대한민국명장이 되고 많은 사람이 명장으로서 사회적 역할과 책임 수행을 기대할 것으로 생각 했다”고 한다.

박 명장은 “대한민국명장이 되고 나서 책임과 의무는 무겁게 느끼고 있지만, 대외 활동도 많이 늘어나고 찾는 사람도 많아져 제2의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정년퇴임 후 박 명장은 2014년 1월부터 2015년 3월까지 ATM KOREA 기술·영업이사, 2015년 3월부터 2016년 5월까지 (주)정현금속 기술·영업이사, 2016년 6월부터 현재까지 (주)코리아에코 기술이사로 재직 중이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박 명장의 전문 강의 분야는 직업진로 교육(자신의 소질과 능력개발, 명장이 되는 길), 인생역경의 성공신화(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1인자가 되자), 기술(기능)인의 책임의식과 사명감(조국 선진화의 기수), 산업현장의 ‘3정 5행’(정위치·정품·정량, 정리·정돈·청소·청결·습관화) 등이다.

박 명장은 예비 기술인들에 대한 강의에도 열성적이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부산교도소, 특성화고 및 중·고교 진로지도 특강(480회), 2015년부터 현재까지 특성화고 및 중소기업 기술지도(146회)와 창원공고 현장실습 및 진로지도, 2015년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 외부강사,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부산교도소 CNC선반 외부 강사로 활동했다.

박 명장은 ‘대한민국명장’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이 높다며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인(公人)이 되었기에 그 참뜻을 늘 되새기며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또한 꾸준히 자기개발을 하여 대한민국 산업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100% 발휘하여 숨은 인재를 발굴하고 우수숙련기술인 육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 명장 에겐 ‘살아 숨 쉬는 그날까지 기술보국(技術報國)위해 사회봉사’라는 인생의 대주제(大主題)가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늘 하심(下心)으로 눈높이를 맞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고마운 마음으로 사후관리까지 책임질 것이다. 또 한 내 역량이 부족한 부분은 전문가를 초청해서라도 열악한 중소기업 및 우수숙련기술인 양성을 위해 헌신하며 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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