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하 대한민국명장

다양한 防産品 열처리 博士…“열정의 온도 높이면 萬事亨通”

 

2006년 9월 4일, 여느 날과 같이 마라톤 연습을 위해 5km를 뛰고 나서 샤워를 한 후에 커피를 마시려고 자판기 앞에 서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2006년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된 것을 축하합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 문자메시지를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기능인으로 살아온 30년, ‘대한민국 최고 기능인’이라는 꿈이 달성된 것이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엄마’였다. “어머니 아들이 대한민국 명장을 먹었습니다.” 떨리는 내 목소리는 전화선을 타고 빠르게 전달됐다. “정말 장하구나 내 아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자마자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 김기하(金琪河)는 1956년 3월 1일 강원도 태백시 통리동 산38번지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구색을 갖췄지만, 정확히 말하면 화전민(火田民)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6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가집마저도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는, 말 그대로 두메산골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 학교에 간다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래도 나는 장남이라 부모님의 기대를 업고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졸업 후에는 멀리 태백시에 있는 태백중학교로 진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20리가 넘었다.

태백 火田民 두메산골에서 ‘龍’이 태어나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은 고교 진학을 적극 권했고, 나는 태백기계공고 금속과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산업역군의 꿈을 키우며 ‘엔지니어’의 인생으로 들어선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어서 동네의 자랑이자 영웅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아침에 우물에 가다가 학교 가는 나를 만나면 먼저 지나가라고 길을 비켜줄 정도였다. 이렇듯 가족이나 동네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학업에 열중했으며 3년간 1․2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변혁’이라 할 수 있는 3학년 1학기 때 서울 영등포구 소재 대한중기에 실습생으로 취직한 것이다. 태백기계공고 최초로 서울에 있는 기업으로 현장실습을 보내게 된 것이다.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보던 빨강․파랑․노랑 신호등을 처음 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난생처음 공중목욕탕이라는 낯선 곳에 갔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대한중기 주조부에서 시작한 실습생 생활은 제강, 용해, 주조, 조형, 목형, 열처리 과정을 차례대로 익히는 것이었다. 당시 같이 근무하던 선배들에게 리포트 작성, 실무이론 등을 배우며 여러 금속 분야를 경험했다. 금속 기술자의 바탕이 된 알찬 실습생활을 마치고, 1975년 고교졸업과 동시에 정식 직원으로 입사해 열처리 분야에서 일했다.

 

대한중기 실습생으로 ‘서울’ 첫발, 엔지니어 인생 시작

나는 기차 바퀴라 할 수 있는 휠(wheel), 군대에서 사용하는 곡사포·대포 등 방위산업제품의 열처리 작업을 담당했다. 낯선 환경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금속과 열처리 분야가 내 적성에 맞았는지 열처리로 쇠에 생기(生氣)를 불어넣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방위산업체는 경남 창원에 공단에 집합해 육성한다는 정부 시책에 따라 창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조성된 공장은 나와 같이 시작해서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같이 지내 온 내 인생의 동반자다. 시간은 흐르고 회사는 대한중기에서 기아중공업, 지금의 현대위아로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나와 공장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잘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쇠의 불꽃 판별로 재질의 성분인 화학원소 함유량을 판별할 수 있는 기능을 익히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했고, 늦게 퇴근했다. 또 실습에 따른 이론을 보충하기 위해 신간 기술서를 사기 위해 마산이나 부산은 물론 서울까지 다녔다.

1983년 12월에 드디어 열처리 기능사 1급을 취득했다. 그리고 창원기능대학(현재 폴리텍VII대학) 금속학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일본 산업시찰은 새롭게 엔지니어의 눈을 뜨게 했다. 1985년 당시 일본 자동차회사는 우리나라보다 기술력이나 품질이 월등히 앞서가는 상태였다. 자동차부품 열처리 라인도 자동화시스템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부품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았고 닛산자동차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출근할 때 월급 받으러 출근한다는 생각보다는 ‘개선’하러 출근한다는 말에 놀랐다.

晝耕夜讀하며 대학 졸업, 實務·理論 겸비한 ‘일인자’

1986년 창원기능대학을 졸업했고 금속재료시험 기능사 1급 자격을 더 취득했다. 나는 모교인 창원 폴리텍VII대학을 사랑한다. 요즘도 가끔 모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목표와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실현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답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신중하고 꾸준한 연습이 따라야 한다.

1986년 5월 기아중공업이 대한중기를 인수 합병했다. 당시 분임조 개선 활동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학에서 배운 품질관리 기법을 적용하여 현장 분임조 개선 활동, 즉 제안 활동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사내 분임조 경진대회에서 은상을 탔고 기아그룹 대회에서 대상도 수상했다.

1991년에 금속재료(열처리) 기능장에 합격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고 기능인으로서 보람과 성취감을 맛보았다. 주위에서는 열처리 박사, 금속재료 ‘일인자’라고 불렸다. 회사에 정규 대학 금속공학과를 나온 엔지니어도 있는데, 금속재료 열처리에 관한 문제는 모두 나를 찾았다.

기능장 취득 후에는 노동부 국가기술자격제도 심의 전문위원에 위촉되어 활동을 수행하고 기능장 시험 출제위원 및 검토위원으로 활동했고 1993년에는 지식경제부가 선정하는 품질 명장에 선정돼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 재능있는 후배 양성에 집중”

내가 근무하는 현대위아는 공작기계 제작, 자동차 부품제작, 특수기계 즉 육군 화포류, 해군 함포, 공군 전투기 랜딩기어, 헬리콥터 착륙 장치 등을 총망라한 국내에서는 열처리 분야에서는 종합적인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군용 헬기, 국내 항공기 부품 및 프랑스 M/D사, 미국 보잉사가 요구하는 항공부품 열처리 기능을 보증하는 국제 NACCAP인증을 2005년 1월에 획득하여 국산품으로 제작하게 된 것은 나의 모든 정열을 바쳐서 한 결과로 지금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2006년 8월 22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대한민국명장 면접 심사를 마쳤다. 창원행 고속버스 속에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강원도 산골에서 새벽같이 학교에 가던 일,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의 두려움, 기능대학 야간학부 시절 등. 집에 도착하니 딸의 이 말이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빠 힘들었지요. 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반드시 이루어질 거예요.”

이제 나는 더 큰 목표가 생겼다. 그동안 열처리 공정을 진행하면서 생산, 품질, 공정개선, 원가 절감을 꼼꼼히 일기장처럼 기록하는 것을 교재로 만들어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견해서 키워내고 준비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주고 싶다.

명장이 되고 국가에서 지급한 지원금을 후배들의 면학(勉學) 장학금으로 보탠 것 또한 큰 보람이다.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를 꿈꾸는 이공계 후배를 돕는 일은 역량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키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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