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업 고려황토성 대표

“民族의 聖地 江華島에 터 잡은 ‘高麗黃土城’은 健康·幸福의 根據”

 

지난 3년 동안 지구촌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깊은 경제침체는 물론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암울(暗鬱)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국내외에서 엄청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恐怖)가 극(極)에 달했다.

그렇다면 코로나19에 감염(感染)된 사람 중에 누구는 사망(死亡)에까지 이르고, 누구는 완쾌(完快)되어 정상적인 일상(日常)으로 되돌아왔을까. 바로 면역력(免疫力) 차이가 정답(正答)이다. 인간이 자신의 면역력을 강화(强化)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음식물을 섭취(攝取)하거나, 약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여러 건강학자(健康學者)가 추천(推薦)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우나’나 ‘찜질’이다. 이 방법은 체온(體溫)을 높여 각종 감염과 싸우는 세포인 백혈구(白血球)를 자극(刺戟)해 인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바이러스를 퇴치(退治)시키는 것이다.

이 밖에 혈액순환을 개선해 심혈관(心血管) 건강을 크게 향상(向上)시켜 혈압을 낮추고 심장 운동도 강해진다. 또 스트레스 감소, 노폐물(老廢物) 배출로 인한 피부 건강 증진, 운동 회복 등 다양한 효과(效果)를 얻을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육체는 물론 정신 건강까지 증진(增進)시켜 주는 명소(名所)가 우리나라 민족의 혼(魂)이 깊게 배어있는 인천 강화도(江華島) 내가면(內家面)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바로 고려황토성(高麗黃土城). 내가면 고비고개로 743번길 239-13번지에 위치한 고려황토성은 김창업(金昌業) 대표가 자신의 인생 경험을 총망라(總網羅)해 탄생시킨 것이다. 3층 건물로 구성된 이곳에는 다양한 아이템의 찜질방이 갖춰져 있다,

‘고향’으로 回歸해 지역발전의 ‘씨앗’을 심다

특히 전국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강화 쑥’ 방(房)은 인기 최고다. 이 밖에 한방(韓方), 소금, 온열(溫熱), 참숯가마는 물론 야외(野外) 온천(溫泉) 스파도 있어 건강은 물론 놀이공간으로도 활용도(活用度)가 높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반려견(伴侶犬)과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활하는 인구가 많은 것에 착안(着眼)해 반려견을 동반(同伴)할 수 있는 공간(空間)도 마련돼 있다.

김 대표가 강화도에 ‘고려황토성’을 구축(構築)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부친(父親)이 강화도로 발령(發令)받아 근무하게 되었으며 김 대표는 이때 태어난 것이다.

김 대표는 “일곱 살 무렵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갔고 이곳저곳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살다가 오십삼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왔다”며 “그동안 객지(客地) 생활을 하면서 늘 마음 한 곳에서 꿈틀거렸던 것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한 향수(鄕愁)였다”고 말했다.

강화도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 강한 김 대표는 “내 고향 강화도는 단군(檀君)의 정신(精神)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유린(蹂躪)당할 때 강화만이 유일하게 온전(穩全)히 보존(保存)된 곳”이라고 자랑했다.

특히 ‘고려황토성’이 위치한 곳의 주변(周邊)에는 매년 봄 진달래 축제로 전국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고려산’이 있으며 바로 앞에는 강화도 내(內) 최대 저수지인 ‘내가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바다를 향한 접근성(接近性)도 훌륭하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식과 즐거움 동시 滿喫

김 대표는 ‘고려황토성’을 단순한 찜질방 수준에 놓고 있지 않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각 분야의 저명인사(著名人士)를 초빙(招聘)하는 인문학(人文學) 강의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일명(一名) ‘7080콘서트’를 개최해 강화도에서 활동하는 무명(無名) 실력파(實力派) 가수를 발굴(發掘)해 양성(養成)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서울 용산공고 밴드부 출신이다. 드럼·봉고 등 악기(樂器)를 다루는 솜씨는 정평(定評)이 나 있다.

김 대표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공군 병장으로 제대(除隊)한 스물네 살 때부터다. 스물여덟 살에 제주대에 편입해 제주도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해 슬하(膝下)에 두 딸을 두고 있다.

김 대표의 제주도 활동은 범상(凡常)치 않았다. 성산포청년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峰)의 신비롭고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성산일출제’를 기획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제주대 환경공학(環境工學) 석사(碩士)와 서울시립대 환경공학 박사인 김 대표의 주도(主導)로 제주의 탁월(卓越)한 자연환경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제주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제주도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함께해야 하는 곳이며, 우리 후손(後孫)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보배”라고 역설(力說)했다.

김 대표는 ‘모든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일념(一念)으로 ‘정치(政治’에도 관심이 컸다. 비록 세 번의 출마(出馬)에도 불구하고 모두 낙선(落選)의 고배(苦杯)를 마셨지만, 그의 의지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祖父인 독립운동가 金承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다

이러한 김 대표의 삶의 정신과 자세는 그의 조부(祖父)에 닿는다. 그의 조부는 한말(韓末) 독립운동가인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이다. 희산 선생은 평북 의주(義州) 출생으로 한성고등사범을 졸업하고 2년간 교육계에 종사했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자 종로에서 며칠 동안 반대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0년 10월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가담했고, 1919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총재부(總裁部)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평북 독판부(督辦府)의 국내 특파원으로 국내에 잠입, 평북과 황해도를 밀행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락기관인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했으며 88개소의 독립단 지단(肢端)을 설치해 군자금(軍資金)을 모으고 수백 명의 애국청년을 독립군에 가입시켰다. 의민부(義民府) 총무부장·광복군사령부 군정국장(軍政局長) 겸 군수국장(軍需局長) 등을 역임했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정부 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3대 독립단체의 신민부·정의부·참의부 중 주만참의부 참의장을 역임했으며 독립신문 사장과 임시정부 교육부장관을 거쳐 해방된 후에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장관급)으로 활동했다.

희산 선생은 독립운동 유공자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사회장(社會葬)으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리고 대한민국건국훈장과 애족훈장 등을 받았으며 국립 현충원에 안장(安葬)됐고 일대기(一代記)는 국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江華의 持續發展위해 總力 强化할 다짐 굳건”

이러한 조부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은 김 대표의 굳건한 애국관(愛國觀)과 정의(正義)에 대한 강한 고집(?)은 소문이 자자(藉藉)하다. 그래서 김 대표는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를 가장 증오(憎惡)한다.

이제 자신의 ‘둥지’로 돌아온 김 대표는 ‘고려황토성’을 근거(根據)로 해서 지역 원로(元老)를 섬기고, 후배를 챙기며 양성(養成)하는데 총력(總力)을 기울인다는 계획이다. 또한 ‘강화도지속발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서 각 동네 이장(里長) 200여 명으로 구성된 조직을 바탕으로 각 지역 특성에 맞는 사업을 발굴하는 ‘강화도백서(白書)’ 발간(發刊)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열린사이버대학 특임교수인 김 대표는 KBS제주방송 동서남북 생활의 지혜 등의 프로그램 진행을 했었으며 저서로는 ‘창조적 리더십’, ‘생활의 지혜’, ‘독립운동사’ 등이 있고, 서울구로남초교 총동문회장과 구로발전위원회 총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目標)는 ‘강화도 성장’이다. 모든 군민(君民)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김 대표의 의지(意志)가 담겨 있는 것이다. ‘초심(初心)을 잃지 말자’는 인생철학이 말해 주듯 김 대표는 오늘도 ‘행동(行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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