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충휴 대한민국명장

“세계 최고 우리 螺鈿漆器 命脈 잇는 게 名匠의 使命”

 

세계 속의 대한민국은 언제부턴가 ‘K’로 통한다. K-팝, K-푸드, K-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서양을 넘나들며 지구촌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분야가 있다.

바로 K-나전칠기(螺鈿漆器). ‘스타’는 바로 임충휴(任忠休) 대한민국명장. 15세 때 ‘자개(조개껍데기)’의 영롱한 빛에 매료(魅了)돼 시작한 일이 어느덧 60년을 넘어섰다. 2004년 칠기 명장으로 선정된 후에는 우리나라 전통공예(傳統工藝)의 부활(復活)과 후진양성(後陣養成)에 더욱 매진(邁進)하고 있는 임 명장은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환경친화적이고 건강에도 좋은 우리 나전칠기가 다시 살아나 명맥(命脈)을 잇고 세계에 그 진가(眞價)가 알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 명장은 또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도 큰 호평(好評)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칠기 제작 기술이 훌륭한 나라는 없다”며 “이런 훌륭한 전통 기술을 정부(政府)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支援)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칠기에 관심을 갖고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다”고 말했다.

忍耐로 點綴된 옻칠 인생 60년

임 명장의 삶은 인내(忍耐)로 점철(點綴)된다. 작업 자체가 끈기로 견뎌내지 못하면 결코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이 깊게 새겨진 것은 어린 시절 부친(父親)의 당부(當付)였으며 임 명장은 마음에 담아 지금껏 흔들리지 않고 있다. 특히 작업실 가장 잘 보이는 벽에 ‘忍耐’라고 쓰인 액자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소위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서울에 온 임 명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몸으로 때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임 명장은 평생 업(業)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공예장(工藝場)에서 일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닷가가 고향인 임 명장에게 마을 어귀에서 흔히 봤던 전복 껍데기는 그저 알맹이를 먹고 버리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듬고, 오리고, 갈고, 칠을 하니 바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임 명장은 ‘칠기(漆機)’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에는 현장에 자개를 전문으로 다루는 곳과 칠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자개를 다루는 것보다 칠을 다루는 게 더 힘드니까 옻칠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만히 과정을 보니 자개는 모양을 만들어 오려 붙이면 되지만 칠을 제대로 못 하면 칠기를 완성할 수 없어서 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임 명장의 성실(誠實)함과 끈기는 이미 정평(定評)이 나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서우리만큼 엄격(嚴格)한 작업 교육을 요령(要領) 부리지 않고, 오랜 시간 여러 차례 반복(反復)되는 과정을 무던하게 견뎌냈다.

3년이 흘렀다. 임 명장은 이때 이미 자신만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정식 기술자’의 자격으로 스카우트 제의(提議)를 받고 옮긴 곳이 서울 보문동에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螺鈿匠) 김태희 선생의 제자인 안승권 선생이 운영하는 공예장이었다.

“全盛期 땐 내노라하는 高官大爵이 顧客”

이곳에선 좀 더 발전된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表面)을 곱게 고르는 작업은 매일매일 이어졌다.

그리고 또 5년이 흘렀다. 이때 임 명장은 업계에서 최고의 숙련기술자가 돼 있었다. 여기저기서 유혹(誘惑)의 손길이 난무(亂舞)했다. 그리고 김호창 선생과 손을 잡게 됐고 몇 년 후 공장장의 중책(重責)을 맡아 일하다 독립(獨立)해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게 됐다.

임 명장은 “당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 원 정도 했다. 그 돈이면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다. 그때 여러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집에도 여러 번 갔었는데 대부분 고객은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 등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迎賓館)에 줄 선물로 자개 병풍(屛風)을 만든 것인데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렇듯 임 명장의 ‘작품’은 주문이 쇄도(殺到)해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 밤낮없이 작업을 해야 했고 직원이 100명에 달했다. 보통 9자 나전칠기 장롱이 완성되는데는 약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需要)가 이어졌을 정도로 시장에서 독보(獨步)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위기(危機)가 닥쳤다. 1978년 유류(油類) 파동(波動)이 작은 ‘펀치’였다면 1997년 IMF사태는 ‘카운터 펀치’가 돼 파산(破産)의 아픔을 겪게 됐다. “당시 서울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다. 대부분 어음으로 결제를 했는데 부도난 돈이 12억 원이 넘었다. 너무 어려웠지만 동지(同志)처럼 일했던 거래처와 직원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있는 모든 재산을 정리해 자재(資材)값과 직원 월급 등을 챙겨주고 문을 닫았다.”

임 명장은 회사 문을 닫음과 동시에 ‘나전칠기’와의 인연(因緣)도 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직(天職)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스스로도 그랬지만 임 명장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지인(知人)들의 만류(挽留)는 상상을 초월(超越)했다.

이렇게 ‘진성옻칠공예사’가 부활(復活)한 것이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붓’을 든 임 명장은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함은 물론 현대적 감각도 가미(加味)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대한민국명장’으로 방점(傍點)을 찍었으며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등 쾌거(快擧)를 이뤘다.

임 명장은 청와대에 나전칠기 가구(家具)를 납품했고 청와대 사랑채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또 종묘(宗廟) 신수장 보수 작업에 참여했으며, 세종시 정부청사 국무총리실에 옻칠 벽화 작업도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해외 전시와 전국 강연을 통해 나전칠기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고 대중화(大衆化)에 노력했다.

“인천에 工藝村 造成하면 세계적 관광지 돼”

이렇듯 임 명장이 ‘나전칠기‘와 운명(運命)을 함께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전통공예인 나전칠기의 명맥(命脈)을 이어갈 숙련된 후배(後輩)를 양성(養成)하는 것이다. 현재 서울시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시 경동에 위치한 ’임충휴갤러리‘에서 수제자(首弟子) 교육에 전념(專念)하고 있다. 또한 중·고교 진로 체험 특강도 수시로 진행하고 있다.

임 명장은 “젊은이들이 글로벌시대에 맞춰 옻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自負心)이 있어야 한다”며 “현대에는 전통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친환경 생활용품 등에도 접목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제품의 다양화(多樣化)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인천에 근거지(根據地)를 마련하고 활동하고 있는 임 명장은 “인천은 세계적 허브공항(空港)과 크루즈항(港) 등 세계적 관광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우리의 나전칠기를 국내외에 알릴 수 있는 최적(最適)의 장소”라며 “국가 차원에서 전문적인 공예촌(工藝村)을 조성(造成)해 준다면 전통문화를 살리는 것과 판매장과 체험장을 운영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誘致) 등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도 임 명장의 손톱 밑은 거무스름한 ‘옻’이 잔뜩 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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