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만 대한민국명장

산업현장에서 ‘해결사’ ‘이 박사’로 불리는 45년 ‘현대맨’

 

“얼마 전에 어느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다 해설자가 ‘중꺾마’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알아보니 그 뜻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신조어(新造語)라는 것이다. 이때 12년 전(前)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만 대한민국명장은 2011년 기계분야 치공구(治工具)설계 직종(職種)에서 선정됐다. 스스로 ‘오뚜기 명장’이라 말할 정도로 사연(事緣)이 많다. 당시에는 같은 직종은 2년에 한 번만 도전(挑戰)이 가능했다.

이 명장은 다섯번 도전 끝에 당당히 ‘대한민국명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무려 1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정부(政府)로부터 선정됐다는 통보(通報)를 받았을 때 “몇 번의 낙방(落榜) 때문인지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 확인 끝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아버님께 알려 드렸는데 목이 메어 말씀을 못 할 정도로 기뻐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당시를 회상(回想)했다.

이 명장의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1977년 8월 1일부터 시작됐다. 영월공고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행용 가방 하나 메고, 중앙선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경북 포항으로 현장실습을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46년 3개월이란 긴 세월을 오로지 한 산업분야에 종사(從事)했다. 처음 영풍광업(주)에 근무한 3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건설기계에서 재직(在職)하며 생산부서, 생산기술부, 보전업무를 맡아 일해오면서 실무적으로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蓄積)할 수 있었다.

다섯 번 도전 끝에 治工具 설계 명장 선정

그러나 이 명장은 “기술인으로 살아가는데 이론적(理論的)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아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울산과학대에 늦은 나이에 진학(進學)하여 기계설계를 전공(專攻)했으며, 몇 년간 주경야독(晝耕夜讀)한 결과 2007년에 기계공학사 학위(學位)를 취득(取得)했다”고 말했다.

이 명장은 평소에 맡은 업무를 수행(遂行)하면서 주변 동료들의 일하는 모습에서 ‘왜 저렇게 할까?’ ‘좀 더 안전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질문(質問)을 스스로 하면서 그 답(答)을 찾기 위해 늘 고민(苦悶)하다 보니 생산 현장에 적합(適合)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도출(導出)해 냈다.

이렇게 해서 탄생(誕生)한 첫 ‘작품’이 ‘현장 맞춤형 치공구 및 설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불편을 해소(解消)하기 위해 개발한 ‘포지셔너형 가접(假接)치구’가 생산성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어 ‘5급 제안상’을 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契機)로 생산기술업무를 맡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생산현장에서 개선업무에 관심(觀心)을 갖고 생산부서에서 개선사항이 있으면 이 명장을 찾아와 의뢰(依賴)하는 경우가 빈번(頻繁)했고 이로 인해 직장동료들 사이에 ‘해결사’ ‘이박사’로 불리게 됐다.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법 고민하다 ‘제안왕’

이 명장은 현재까지 생산 현장에서 꼭 필요한 수백 건(件)의 치공구 및 설비를 개발하여 안전하고 쉽게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 조성(造成)에 큰 역할(役割)을 했다는 평가(評價)를 받고 있다. 그 결과 ‘특급 제안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등급 높은 제안상과 14건의 관련분야 실용신안(實用新案) 및 특허(特許)도 취득했다.

이 명장이 개발한 치공구는 제품생산에 있어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제조 수단으로 공작물(조립품)의 위치결정과 공작물(工作物)의 움직임을 고정(클램프)시켜 허용 공차(제품 공차의 1/20~1/50) 내에서 제조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 공구로써 설비와 공작물 사이에 위치하여 제품의 균일성(품질), 경제성(가격), 생산성(납기)을 향상하고 풀푸루프 기능을 추가하여 안전하게 생산할 수 있는 보조장치다.

이로 인해 제품의 정밀도(精密度)를 높여 품질을 향상하고, 균일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으며 생산의 다량화(多量化)로 제조원가 감소, 가공(加工) 공정(工程) 단축, 일부 검사작업 생략 및 시간 단축, 미숙련자도 정밀작업 가능, 작업자의 피로도(疲勞度) 감소, 작업 능률 향상,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 등의 기대효과(期待效果)를 거둘 수 있다.

이 명장이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된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주로 근무처를 중심으로 맡은바 직분(職分)에 충실하고, 직장동료들과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직장인에서 대내·외적으로 활동 범위가 많이 넓어졌고, 숙련기술인으로서 지위 향상과 사회적 가치 또한 많이 높아졌음을 인식(認識)함은 물론 책임(責任)과 사명감(使命感)도 크게 느꼈다고 한다.

“후배에게 ‘경험’ 물려주는 건 道理이자 權限”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숙련기술인 반열(班列)에 오른 이 명장의 ‘꿈의 씨앗’은 언제 심어졌을까.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農事)가 천직(天職)이리라 생각했던 이 명장은 1972년 중학교에 입학해 기술과목을 접하고 나서 ‘기술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決定)했다. 그리고 공고(工高) 기계과에 진학했고, ‘현대’와 평생(平生)을 동락동고(同樂同苦)하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책임’에도 소홀함이 없다. 그 첫 번째를 ‘숙련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전수(傳授)하는 것’이라고 역설(力說)하는 이 명장은 “현직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퇴직(退職) 후에도 그 고귀(高貴)한 ‘스킬’을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후배들에게 이어주는 것은 도리(道理)이자 권한(權限)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명장은 이러한 현실이 선순환(善循環)되기 위해서는 범국가 차원의 정책(政策)이 필요한데 지역별 특성에 맞는 교육 장소와 기자재(機資材) 지원과 명장에 대한 창업(創業) 지원 등을 통해 각자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發揮)해 사회에 환원(還元)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현장에 있으면서 늘 긍정적인 생각과 즐거운 마음으로 업무에 임했던 이 명장은 정년퇴직 후에도 협력회사 육성(育成)에 6년을 공들였다. 그리고 이제 그 ‘업적(業績)’을 갖고 어디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苦悶)할 행복(幸福)한 때’가 됐다.

이 명장은 “지금까지 선배들을 통해 습득한 기술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대물림할 때”라며 “지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롭게 변화(變化)하는 신기술을 접목(接木)하여 제조업 분야에서 꼭 필요한 치공구를 각 기업의 현장 특성을 고려(考慮)한 맞춤형으로 설계·제작해 더욱 안전하고 쉽게 일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하는 일에 전념(專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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