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45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김재수 사장, “국민 신뢰받는 글로벌 농수산식품 전문 공기업으로 도약”

지난해 12월1일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창립 45주년을 맞았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농수식품 수출 진흥 및소비 촉진을 통해 우리 농수산업의 미래 가치를 창조해 온 자랑스러운 역사다.

45년의 역사를바탕으로 공사는 21세기 대한민국 농수산업의 역사 또한 새롭게 열어 가고 있다. 농식품 수출을 견인하는 해외시장 개척기관으로서, 국내 농수식품 소비촉진과 마케팅을 지원하는 유통 조성 기관으로서 서울을 비롯한 국내 11개 지사와 일본 중국 싱가포르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대만 등 전 세계 10여개 해외 aT센터를통해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한국 농어업을생각하고 농어민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고 그 정신은 설립 이래 한결같이 이어온 공사의 정신이다.

공사의 전신인농어촌개발공사가 설립된 것은 1967년 12월 1일. 우리나라 농수산물의 저장·처리및 가공업을 개발 육성하여 농어민의 소득을 증진시킨다는 것이 설립의 주된 목적이다. 설립 목적이 농어민의소득 증진이라는 것은 당시 우리 농어민의 소득 수준이 매우 열악했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아울러 농어촌의현실적 어려움이나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미미하여 국가 차원의 공사 설립이 시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따라서 공사는 농업과 공업의 균형발전이라는 농공병진(農工竝進)의 숙원을 안고 탄생한 것이다.

설립 직후부터공사는 농수산물 가공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강구했다. 특히 단일화된 전문기구를통해 전략적인 개발 품목을 선정하여 원료와 생산에서부터 가공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종합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다.

이 같은 필요성을인식한 공사는 수출이나 소득 및 고용 효과가 크고 전국적으로 파급시킬 수 있는 전략 농수산물을 선정하여 우선 공사 직영의 시범사업으로 전개했다. 공사는 1970년 12월수출전략 농산물인 양송이 생산 가공업체인 삼원농산을 인수해 경영혁신과 운영 개선을 통해 성장가도를 달렸다.

 ▶ 농수산물 가격안정전문기관의 역할과 위상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농어촌개발공사는 대규모 차관을 도입해 농산물 복합가공 사업과 농산물 가공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를 통해 우리 농어촌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그것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그 의미가 컸다.

이런 가운데 197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기조는 농수산물 가격안정의 체제로 바뀌어갔다. 당시 우리 농업은 농산물 재배 지역이 광역화되어 있고 생산규모가 영세했다. 또한생산의 주기가 계절성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가격 상승에 민감하여 재배 면적의 조정기능이 취약했다. 특히도시 인구의 집중화로 주곡인 쌀을 제외한 기타 농수산물의 소비와 유통량이 급증하고 있었으나 통계의 신뢰성에서부터 유통량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유통실태의 파악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수급의경직성 등으로 인해 농수산물 가격은 폭등에서 폭락으로 계절 변동 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농가의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소비자의 구매력이 낮아졌으며 저축보다는 환물 심리가 팽배하여 투기행위가 성행했다. 결과적으로농수산물의 가격 안정 정책이 없이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합리적인 소득 분배가 어려웠으며 나아가 이런 현상이 경제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대두됐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 농업정책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바로 농수산물 가격의 안정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농수산물 가격을 연중 적정 수준으로 안정시켜 농가소득을 보장하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1976년부터 주요 품목에 대한 비축사업을 실시했다. 이 사업은 정부가일정한 수매가격에 따라 생산단지 중심으로 과잉 생산된 농수산물을 수매하고 공급 물량이 부족할 때는 외국으로부터 적정 물량을 수입하여 비축하였다가단경기에 방출하는 가격안정화 정책사업을 본격화했다.

▶ 유통구조 개선과유통인 양성의 밑거름되다

 농수산물은 식생활과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유통구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크며 또 많은 사람들이 유통구조에 문제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농수산물이 공장에서 양산되는 공산품과 달라서 쉽게 부패하고 고유의 가치에 비해 부피가 크고 생산및 소비의 규모는 작으나 전국에 걸쳐 있으며 기상조건에 따라 풍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수산물유통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 어느 나라나 공통으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이처럼 국민적관심이 큰 농수산물의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유통을 효율화하는 문제를 민간기능에만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직·간접으로개입하는 사례가 많다. 선진국의 경우는 간접적인 지원을, 후진국의경우는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하는 것이 농수산물 유통정책의 일반적인 형태다. 이렇듯 정부가 농수산물 유통에직간접으로 개입하는 이유는 농수산물 유통산업이 갖는 공공재적 성격, 외부성의 존재, 자연독점산업, 소득 재분배, 경제의안정과 성장, 그리고 불확실성 등의 특성 때문이다.

1980년까지 우리나라의유통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전개하여 왔으나 80년대 후반부터는 민간기능을 활성화하는간접 개입으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농어촌개발공사의 유통개선 사업도 정부의 농수산물 유통정책 방향과동일한 방향에서 성장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공사는80년대에 농수산물 가공업체에 대한 2차 차관자금의 지원과 유통시설의 확충 및 근대화 자금의지원, 농공단지 입주업체의 지원, 농수산물 직거래 유통망구축을 위한 직판장의 설치 및 운영, 농수산물 유통 종사자의 전문지식 함양을 위한 유통교육원의 설립등 유통사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 변화하는 세계, 위기의 농어촌 - 세계와 시대의 도래와 경영혁신

 공사는 농업과공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농공병진’의 정신 아래설립 초기부터 우리 농어촌 근대화 및 현대화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런 가운데 1980년대로 접어든 이후 세계가 빠른 속도로 단일시장화되면서 우리 농수산물의 세계시장 개척이 중요한 과제로떠올랐다.

하지만 80년대로 오면서도 세계를 향한 그 발걸음은 아직 더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공사 창립 당시 우리나라 농수산물 수출은 대부분 미가공 상태의 활선어 패류 해태 등 수산물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농산가공 제품은 생사·엽연초 등 소수 품목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시장의 개척이나수출을 위한 신상품 개발에 대한 인식은 매우 미흡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열악한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공사는 창립 초기부터 조직력과 자본력 그리고 대외 공신력을 기반으로 가공식품의 생산 여건을 조성했으며 또 수입 대체나 수출시장개척이 가능한 농수산물 가공산업에 대해서는 투자회사를 설립하여 적극 지원했다. 설립 직후 2년 동안 공사가 설립한 투자회사는 22개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10여개 회사가 농수산물을 가공하여 직접 수출에 참여했다. 이것이국내 농산가공품의 수출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 경제위기 속에더욱 빛난 경영혁신의 바람 - IMF 외환위기와 경영혁신

 세계화와 정보화시대를 맞아 해외 시장 개척과 정보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여 온 공사는 1990년대 후반에도 경영혁신을지속했다. 경영 전반에 관한 혁신의 노력은 21세기 새로운도약의 미래를 맞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이었다.

1997년을 맞아 공사는 1월1일자로 직제 규정 시행 세칙을 전면적으로 개정했고 사내 카운슬러제도가시행됐다. 1997년부터 본격화된 경영혁신 운동 ‘FIRST21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이 제도는 업무 이외 사항에 대해 직원의 애로나 궁금증을 해소함으로써 즐거운 직장 분위기를조성할 목적으로 도입됐다. 이 제도는 건강관리 취미생활 등 6개분야 33개 종목 50명의 전문가를 사내 카운슬러로 지정하여운영했다.

공사가 경영혁신으로거듭나고 있던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리고 12월 3일에 의정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이른바 ‘IMF 경제 신탁통치’ 체제로 접어들기에 이른다. 국민 모두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은 운명이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공사는일찍이 경영혁신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해 경제위기 속에서도 농수산물 유통과 세계 시장 개척이라는 본연의 의무에 더욱 충실하였다. 아울러 범국민적인 금모으기운동에 동참하여 2억원에 가까운 성금을모으고 과소비 추방 운동을 벌이는 등 경제위기 극복에 일익을 담당했다.

▶ 새로운 사옥, 새로운 도약 - 최첨단 aT센터의 건설과 수출 체계의 선진화

 농수산물유통공사의오랜 숙원이던 서울농업무역센터가 준공된 것은 2002년 9월. 1994년부터 농수산물 무역진흥센터라는 이름으로 건립 계획을 수립한 지 7년, 1998년 11월 기공식을 가진 지 4년만이다.

공사는 국내외마케팅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농수산물 무역진흥센터나 서울농업무역센터를 대체할 이름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aTcenter(Agro-Trade & Exhibition Center, Seoul)'다.

그 해 10월 15일, 마침내 aT센터는 공식적으로 개관됐고 우리나라 농수산물 유통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aT센터는 농수산물 생산자와 수출업체, 바이어가 한 곳에서 만나국제 교역을 수행할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는 21세기형 첨단 농업 전문 전시 컨벤션 센터다. 부지 5,700평 연면적 1만8,000평에 지하 3층 지상 15층규모로 총사업비 773억원이 투입됐다.

aT센터 개관식은 2002년 1월 15일. 개관에 즈음하여 당시 김진배 공사 사장은 “ 농수산물 수출 시설과기능을 한 곳에 갖춰 농어업을 경쟁력있는 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양재동에 우뚝 솟은 aT센터는 바로 공사의 21세기 도약을 함축하는 공간이자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우리의 농수산업을 상징하는 기념비다.

무엇보다도 2012년 1월에는 농식품산업의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위해 45년 역사의 aT 명칭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로 변경되었다. 그동안 농수산물 유통개선과 수급 및 가격안정 위주의 사업에서 수출  촉진과 식품산업육성, 농수산물사이버거래, 국가곡물조달사업 등 농어업과 식품산업의 동반성장을 위한 기반조성에 주력하기 위해  대규모 신규 사업이 확충됨에 따라 조직자체가전면 재편된 것이다.

이렇게 사업영역이대폭 확대됨에 따라 성과와 효율중심의 조직으로 개편하고자 임원중심의 회의문화도 토론과 토의중심의 문화로 바꾸는 한편, 신규 사업의 효과적인 수행과 안착을 위해 전 직원들의 공감대 형성과 상호협력의 조직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 공사의 김재수사장은 “자고로 농업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고,G7, G20 등 세계 선진국들은 다름 아닌 농업선진국들”이라며 “따라서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농업발전을 위한 성장동력을 갖추어야하며, 안정적 농업생산기반 확충과 농산물 가공, 수출, 연구개발 등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농업은단순한 식량 생산을 넘어 첨단과학과 기술이 융복합된 고부가가치 생명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측면은 물론 미래의 먹거리나, 우리 7천만 민족의 명운이달린 중요한 산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각국과의 FTA체결 등 시장개방 또한 경제 통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외교, 안보등 미래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도 필요한 국가적 과제임을 인식하고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어업인들과 관계기관들 모두가 스스로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김 사장은 “급변하는 환경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aT는 적극적인 수출촉진과 식품산업육성 등의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농수산물 사이버거래, 국가곡물조달시스템 구축 등의 신규 사업 확충으로 국민에게 신뢰받는 글로벌 농수산식품 육성 전문공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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