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덕포진(德浦鎭)은 조선시대의 진영(陣營)으로 사적 제29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년)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년)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됐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함대와 싸웠던 격전지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판단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덕포진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김포의 한 농부에 의해서다. 만일 그 촌부(村夫)의 의지와 사명감이 없었다면 아마 덕포진은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김기송(金基松) 씨. 현재 명함에 쓰인 직함은 김포시문화관광해설사다. 과거에는 경기도 제1호 새마을지도자, 김포문화원 원장, 김포체육회, 김포노인회 등 지역의 다양한 기관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32년 김포 출생인 김 해설사는 56년 화성군청에서 근무하고, 57년부터 군복무를 하고 60년 제대 후 63년에 김포 대명항 인근에 ‘신명학당’을 설립해 무료로 학생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김 해설사의 애향심과 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이때부터 다져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지금도 충·효·예의를 강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정신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김 해설사는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부(富)의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정신자세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돌’ 추념제 시작으로 역사 유적지 복원 집념 커

그렇다면 김 해설사가 덕포진 발굴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김포 대명리에는 ‘손돌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내용은 바로 고려 고종이 몽고의 침략을 피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 위해 김포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건너 가는데 해류(海流)에 의해 위험을 느낀 고종이 사공(沙工)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 사공을 참수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손돌(孫乭)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탄 배는 손돌이 죽어가면서도 알려 준 해류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괜한 오해로 손돌을 처형한 고종은 잘못을 뉘우치고 사공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손돌의 무덤이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던 손돌의 이야기를 역사적 유원지로 개발하자고 처음으로 의견을 낸 사람이 바로 김 해설사다. 그래서 사비(私費)를 들여 비석도 세우고 추염제도 지내게 되었는데 이 행사는 1970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진행하던 당시 행사에 참여했던 경기도 공무원 한 사람이 ‘덕포진 포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김 해설사는 자신의 논 벼베기를 위해 온 일꾼들을 던포진이 있었을만한 곳으로 데려가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970년 가을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시작한 발굴 작업이라 초기에는 진척이 매우 부진했다. 그러나 김 해설사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이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단호한 의지로 작업을 진행하던 차에 꿈에 ‘손돌’이 나타나 어느 장소를 환하게 비춰주었다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이 꿈으로 나타나 포대 발견…私費들여 발굴 작업

그리고 그곳을 파내려가지 시작했고 5m 정도 내려가자 포대(砲臺)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발굴 작업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당시 정부에서 중지시킨 것이다. 김 해설사의 말로는 감히 농사꾼이 역사적인 작업에 관여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라는 것이다.

그래도 김 해설사는 발굴을 이어가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했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덕포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땅 속으로 더욱 깊이 묻히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80년 재발굴 허가를 받아, 공사에 착수하자마자 화포(火砲) 3문(門)과 포대(砲臺) 15개소 및 추가로 화포 3문을 출토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각 포대에 공급하는 불씨를 보관하던 파수청과 7개의 포탄,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됐으며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그리고 1980년 11월에 사적 제 292호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 해설사는 왜 덕포진 발굴에 평생을 받쳤을까. 그는 “김포는 역사적으로 한양을 지키는 최전방이었다. 그 중심에 덕포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 후손이 외면하면 절대 안 된다”며 “이러한 사실은 모든 국민, 특히 청소년들에게 알려줌으로써 나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우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덕포진은 아직 미완(未完)의 역사현장이다. 비록 발굴현장에 전시관이 지어졌고, 진입로도 확장해 많은 사람들이 원활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본진(本陣)이 온전하게 발굴돼야 덕포진은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해설사는 “내 생전에 꼭 덕포진 본진이 복원돼 수도 서울을 지켜왔던 김포의 역사적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한다. 덕포진을 후손에게 온전하게 복원해 물려주는 게 마지막 남은 소원”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덕포진 복원으로 대한민국 정신교육의 현장되기를”

김 해설사는 덕진포 발굴 작업이 중단된 상태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보였다. 그는 “통진읍지에 의하면 본진의 건물 규모와 배의 숫자 등이 나와 있는 상황인데, 복원은 진척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며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더 훼손되기 전에 하루 빨리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의 덕포진 모습이 갖추어지기까지 김 해설사의 정신적 육체적 노력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투입된 자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 해설사의 사비(私費)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는 추측이 충분하다. 하지만 김 해설사는 이 사실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나중에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한다는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였다.

이에 대해 김 해설사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 발굴 작업은 절대 할 수 없는 과정”이라며 “이 일은 역사에 대한 책임과 사명감이 없이는 결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하나의 증거가 바로 재단을 설립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박물관과 기념관 등을 사재(私財)로 건립해 기부했다는 것도 김 해설사의 진정성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증거다.

김 해설사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후세에 대한 교육에 열정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지도자로서 지역발전과 지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야말로 김 해설사는 지역의 큰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게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不斷)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어르신들에게는 인생의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는 언행(言行)에 대해 강조한다. 나이가 많을수록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며 쓰레기를 줍는 작은 일부터 지역발전에 참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 해설사의 인생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덕포진은 지리적 크기로 보면 김포의 작은 지역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와 정신은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며 “따라서 덕포진을 완전히 복원시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정신 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고, 국가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국민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표상(表象)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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