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감천마을…외국 관광객 단골 ‘이상한 나라’

◾감천동의 유래

감천동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가 오래된 마을

이다.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이며 감(甘)은 ‘검’에서 온 것으로 ‘검’은 신(神)이란 뜻이다. 천(川)은 ‘내’를 말하며 그 이전에는 내(內)를 적어 감내래리(甘內來里)이며 감내(甘內) 또는 감래(甘來)라고 했고 다내리(多內里), 다대(多大)안쪽 마을로도 불렸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물이 좋아 감천(甘泉)또는 감천(甘川)이라도 하는데 이곳은 육지가 오목하게 형성돼 있어 많은 선박이 이곳에 들어와 급수를 받았다고 전해지도 한다.

그리고 감천은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지역으로 그 대표적인 유물인 지석묘(支石墓) 6기가 발견되었는데 남방식(南方式) 지석묘가 2기, 변형적 지석묘가 3기, 표석식(標石式)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1기 등으로 종류가 다양해 시대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 감천에 지석묘가 영위된 청동기 시대가 매우 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부터 3,000년 전쯤부터 북쪽에서 들어온 청동기 문화를 앞서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바다 주변에 살았던 것과는 달리 산비탈에 살며 땅 위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벼도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감천동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며 제1-3호는 감천화력발전소 사택 촌 앞 도로를 따라 있었다. 제1호에서는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출토되어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제2, 3호는 도로공사를 하던 중 중장비에 밀려 파괴되었고 상석(上石)은 도로 밑에 묻혀버렸고 출토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4호 역시 구도(舊道) 서쪽 밭 가운데 있었으며 마을에서 옛날부터 복(福)바위 라고 불렀고 이 바위를 건드리면 복이 나간다는 전설 때문에 잘 보존되었다. 이것도 공장을 건설하면서 발굴조사 하였으나 유물은 없었다. 제5호는 해변 서북쪽의 산기슭 산에서 흘러내린 흙에 묻혀 상석(上石)만 보였는데 택지조성으로 파괴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단병식(二段柄式)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채집되었다. 이 석검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제6호는 현재 감천1동 버드나무식당의 뜰에 있으며 지주(地主)가 잘 보호하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남방식(南方式) 지석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조사가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단 하나뿐인 지석묘는 마을 주민을 비롯하여 부산시민 모두가 잘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감천의 지세

감천의 지세(地勢)는 주변에 천마산(326m), 장군산(105m), 아미산(152m), 금티산 옥녀봉(250m)이 있으며 산세가 안방에 병풍을 놓은 듯 한 모양이다.

천마산에는 조선시대 천마산성이 있었으며 정상에는 천마석성(봉수대)이 있었으나 현재는 돌탑만 남아있다. 다대포 아미산 정상 봉수대와 버금가는 금정산 봉수대에 신호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두송반도 지역 산들을 일명 ‘끝바리’라고도 지칭하기도 한다.

감천만은 조선시대에 천마산성(天馬山城)과 서평포진(西平浦鎭) 사이에 깊이 들어간 감천만에 위치한 요지로 출입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도 했다 전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그 건물이 해방 후 국방경비대(국군 전신)에서 사용하다가 6·25동란 때에는 영국군 부대가 사용했다.

감천만의 동쪽에는 작은 어촌이 원래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북쪽 해변에는 작은 해수욕장이 있었는데 1962년 이곳에 부산화력발전소 건립공사를 시작하면서 해수욕장과 그 앞에 용두암 작은 섬이 있었는데 그만 사라졌다.

감천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감내 또는 감천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천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시 구역확장으로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구(區)제 실시로 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1월 21일 부산시 조례 제156호의 동(洞)제 개편으로 감천동을 감천1동과 감천2동으로 나누었고 1983년 12월 사하구 승격과 함께 사하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천동은 지형이 대한민국 지도와 같다. 일명 ‘끝바리’에 가서 바라보면 감천문화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있는데, 감천1동에 냉동창고가 많이 건립되면서 그 모양이 많이 훼손되었고, 천마산 천해로 산복도로 11통 지내 마을 포토존에서 내려다보면 감천문화마을은 분명 북한 지도와 같은 모양이 선명하다.

그 길은 별빛투어코스, 달빛투어코스로 아주 좋은 곳이다.

◾마을의 생활상

부산에는 1951년에서 1954년 사이 대화재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부산역 화재사건, 용두산, 동광동 국제시장 대화재 사건은 부산에 큰 재앙임이 틀림없다. 산비탈에 빼곡히 들어선 피난민들의 거처는 화재에 취약했다.

신흥종교 태극도는 당시 중구 보수동에 있었는데 화재의 위험성이 크게 드러나면서 부산시와 국회 조경규 3대 부의장이 태극도 본부에 찾아와 도주와 임원들에게 이주요청을 했다. 애초 부산시는 영도 청학동 일원으로 이주지로 지정했지만, 태극도 도주와 임원들은 감천으로 이주하겠다고 답신하여 1955년 10월 7일 자 800세대 4,000여 명이 동시에 이주했다.

1957년에서 1960년 초반에 5,500세대로 주민 수 29,800여 명으로 당시는 대동(大洞)이었다. 태극도 본부 역사관에 당시 사진들을 보면 당시 주택은 100% 판자집이었고 생활상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마을의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이웃사촌의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있어 아름다운 마을임은 틀림없다

식량이라야 ‘녹갱이’가 전부였고 초근목피로 연명했으며 1970년도 주민들은 부산시에 주택보수승인 요청하여 1975년도 보수승인을 받아 판잣집 벽은 블록 12장, 지붕은 슬레이트로 보수하여 지금의 감천문화마을이 되었다. 당시 건축자재 운반은 모두 초등학생들이 운반을 책임졌다. 그만큼 아이들도 많았다.

◾감천문화마을 탄생

2009년 다대포 아트 팩토리아 ‘민’ 진영섭 대표와 동서대학교 이명희 교수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반달 모양의 지형에 올망졸망한 계단식 주택의 모습이 정말 화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천2동 지도부들을 만나고 이곳을 문화마을로 우리 다 같이 노력하자며 설득하여, 2009년 문체부 주관 마을공모전에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고, 상금 1억 원을 받아 조형물 10점을 설치하면서부터 마을이 시작됐다. 그 후 사진작가가 매일 100여 명씩 온 동네를 누볐다.

2010년 역시 문체부 주관 콘텐츠 융합형 관광협력사업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상금 2억여 원으로 당시 주택 12동을 매입하여 테마가 있는 집, 작은 박물관, 사진 갤러리, 어둠의 집, 하늘마루, 북카페, 평화의 집, 현대인의 방, 바람의 집, 작은미술관, 계란놀이, 빛의 집 등등으로 방문객들의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감천2동은 모두 18개통이지만 당시 5개통에 국한되어 있었고 면적 0.62㎢(구의 1.5%), 4,000여 세대, 주민 수 8,200여 명(65세 이상 26.4%) 2011년 공동체 회원 100명으로 2012년 사단법인 등록되어 정식적으로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지금의 조직은 임원, 회장 외 10명, 운영위원. 특별회원 포함 24명, 협의회원수 120명이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민협의회에서 결정하고 주민 스스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마을공동체 역량 강화를 통한 자립형 주민 공동체 조직이며 주민, 관, 예술가로 구성된 창조적 커뮤니티이다. 이러한 마을주민협의회에는 6개의 단체가 있다.

①봉사단은 방문객 안내, 주차계도 마을청소 ②홍보단은 마을홍보, 월 1회 마을신문발간(과거와 현재) ③사업단은 마을기업운영 ④생활개선사업단은 노후주택 집수리 ⑤민박사업단은 게스트하우스운영 ⑥예술단은 예술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주민협의회에서는 매년 감천문화마을 골목축제를 주관하고 있으며, 마을기업 운영을 통한 지역 환원사업으로 1년 1억 원 상당의 예산을 확보하여 집행하고 있다.

감천문화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민 일자리 창출 기반시설로는 감내골행복발전소, 방가방가 게스트하우스, 감내마을 공방건립, 주민공동작업장 및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마을을 방문하는 체류형 관광객을 위해 숙박 공간도 제공하고 있으며 황토소금가마 특판장 설립으로 새로운 수익창출도 기대된다.

방문객을 위한 관광해설사를 운영하고, 스탬프투어코스를 발굴하고, 마을지도판매 등을 통하여 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유네스코 국제워크 캠프개최

2015년 유네스코 지속가능 발전교육(ESD)인증 ‘국제 워크캠프’ 감천문화마을 주민 역사기록 영상 기록물 제작, 마을주민 인터뷰 등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으며, 프랑스, 터키, 일본, 러시아, 중국, 멕시코, 스페인 등 11개국 청년이 마을을 찾아 주민과 함께 ‘예술과 문화로 마을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유네스코 국제 워크캠프를 2011년에서 2012년 2년 연속 14박 15일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지역개발 및 거버넌스’라는 주제로 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마을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마을가꾸기 프로젝트를 운영한 결과 유네스코의 지속가능발전교육인증을 받았다.

2012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문화관광부), 지역전통 문화브랜드 우수상(문화관광부), 아시아도시경관상 대상(국제연합 인간거주위원회, UN-HABITAT) 2013년 민관협력 우수사례대상 대통령상(안전행정부), 2014년 국민대통합위원회 마을공동체 우수상(한국지방정부학회), 2015년 도시재생사업추진평가 최우수상(부산광역시), 2015년 공동체글로벌 한마당 대상, 2015년 한국관광 100선 선정(부산의 대표적 해운대, 태종대, 감천문화마을)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연대감과 소속감을 끌어내 세계적인 창조적 도시재생사업의 ‘롤’ 모델을 인증하는 IAEC(국제교육도시연합) 제1회 우수교육도시에 선정되어, 2016년 6월 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열린 제14회 국제교육도시연합 총회에서 ‘감천문화마을을 소외된 비탈마을에서 활동적인 지역으로의 변모한 창의적 재건사업’을 주제로 발표했으며, 2016년에는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감천문화마을 방문자 현황

2011년 25,126명, 2012년 98,348명, 2013명 304,992명

2014년 797,092명, 2015년 1,281,361명, 2016년 1,835,426명

(무인계수기→마을 입구 작은 박물관 앞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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