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한국전쟁 '소년병' 출신…

참전 체험수기‘낙동강’펴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은 시작됐다. 1950년 8월초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했다. 즉 최소의 전투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을 살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됐는데 포항·기계·안강을 잇는 동부 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 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했다. 또한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 공산군의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전 이래 가장 큰 전승으로 기록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북한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던 이 치열한 전투 현장에 16살 소년병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전투사실을 세세히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책 ‘낙동강(전 8권)’을 펴낸 류형석 세무사(77세). 류 세무사는 당시 대구농림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1950년 8월에 입대한 류 씨는 제1사단 제11연대 제1대대 통신병으로 처음 참전한 것이 경북 칠곡의 다부동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제1사단은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치며 북한군의 '8월 총공세'를 저지했다.

“6.25와 북한에 대한 실상 제대로 알아야” 

류 씨는 “이 전투에서 아군 4천 명, 북한군 1만2천 명이 전사했다”며 “처음 투입됐을 때 진동하는 시체 썩는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는데 2~3일 지나서는 북한군 시체를 쌓아 만든 참호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당시의 처참함을 회고했다.

류 씨는 ‘낙동강’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언제부턴가 6.25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그때의 사실이 잘못 전달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10여년에 걸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류 씨가 전쟁이 발발한 것을 처음 안 때는 대구농림중학 2학년. 경북 선산군 집에서 대구까지 기차통학을 했는데 어느 날 제때에 통학열차가 오지 않았다. 대낮쯤 부산행 '11호 완행열차'가 들어왔는데 매우 혼잡하고 옷도 제대로 못 입은 피란민들이 타고 있었다. 그 뒤로 여객열차가 끊겼다. 학교는 7월 5일 무기휴학에 들어갔다.

학교가 쉬는 바람에 류 씨는 집 농사일을 거들었는데 7월 25일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니 마을을 비우라는 '소개령(掃開令)'이 떨어졌다. 따라서 그의 가족은 낙동강을 건너 경북 영천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류 씨는 이곳에서 ‘군인’이 됐다. 그는 “나라가 위기에 닥쳤으니 학생들이 공부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는 식의 거창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며 “당시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반공의식이 깔렸던 터라 북한군이 침공했으니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징집 연령은 20세 이상이었고 18세 이상이면 지원할 순 있었다. 그러나 16살 류 씨는 전쟁터로 자신을 이끌었다.

그와 함께 징집된 장정 170명은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갔다. 류 씨는 당시 열악한 훈련실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훈련소는 제사 공장 구내였다. 내무반 옆에는 큼직한 기계들이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일제 99식 소총으로 포복과 각개전투 등 훈련을 받았다. 총을 메면 땅에 끌릴 정도였다. 열흘째 수료하는 날 사격장에서 M1소총 8발을 쏴봤다.”

M1소총 8발 쏘고 ‘다부동전투’ 무전병으로  

이게 훈련의 전부였다. 그리고 류 세무사는 군번 0151993의 소년병이 된 것이다. 대구 팔공산에 자리 잡은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 11연대 1대대 통신병으로 배치된 류 씨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무전기를 메고 전장(戰場)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류 세무사의 몸은 앞으로 조금 굽어져 있고 좌우 어깨의 높이가 약간 다르다.

낙동강다부동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힘입어 수월하게 북진을 할 수 있었다. 북한군과의 교전이 없는 것은 다행이었으나 매일 100리를 걷게 돼 발바닥엔 물집이 하루에 여러 개씩 생겼다 터졌다가 반복됐다.

류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에는 걸음을 뗄 수 없어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M1소총을 지팡이 삼아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며 “걸으면서도 잠을 자다 앞 사람과 부딪혀 잠깐 정신을 차리다가도 다시 서서 잠들었고 곧 뒷사람에게 부딪혀 밀려서 걸음을 옮겼다”고 말했다.

10월 10일 그의 부대는 38선을 돌파했다. 그리고 10월 19일 북한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평양에 입성했다. 당시 평양 모습에 대해 류 씨는 “시내 곳곳에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시가전을 준비한 듯했다. 하지만 큰 전투 없이 무혈 입성했다”고 말한 뒤  “김일성은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승용차를 버리고 산속으로 달아났다. 김일성 승용차는 지금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며 승리의 기쁨을 회상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부대는 평양에서 하룻밤 잔 뒤 북진을 계속했고 평남 신안주에서 평북 박천을 거쳐 수풍발전소 방향의 영변으로 올라갔다. 10월 25일 압록강 접경인 태천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고 한밤중 중공군에 포위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류 씨의 부대는 태천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붙었다. 아침에는 국군이 진격하고, 밤에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리곤 했다. 세 차례 공방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후 그의 부대는 태천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퇴의 길에 들어섰다. 38선으로 철수해 임진강을 놓고 대치했다.

두 형 전사 아픔…꾸준히 6.25전쟁사 집필활동 계획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향해 1월 4일 서울을 빠져나갔다. 소위 1·4 후퇴였다. 천안까지 밀렸다가 다시 반격했다.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임진강까지 진출해 그의 부대는 문산에 주둔했다. 1951년 4월부터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있었다. 서울 점령이 목표였다. 임진강에서 수색까지 두 차례나 진퇴를 반복하는 혈전이 벌어졌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서서히 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였고 류 세무사는 사회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 드디어 휴전이 됐고 그는 일등중사(하사)로 전역했다. 군대 갈 나이인 스무살에 제대했다. 그러나 류 씨는 6.25전쟁으로 두 형을 잃었다. 아직까지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당시 학도병이 학교로 돌아가면 한 학년 위로 복학시켜주는 규정이 있었지만 류 씨는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공무원 채용시험인 보통고시에 합격, 1956년 국세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국세청을 퇴직한 그는 대우 기획조정실과 대우엔지니어링에서 10여년을 근무한 뒤 현재 세무사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비극적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걸어 온 류 세무사는 소년병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참전수기인 ‘낙동강’을 펴낸것이다. 40여명의 소년병 출신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당시의 기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해 10년만인 올 초에 낙동강'이라는 전 8권짜리 6·25 전쟁사가 탄생했다.

류 씨는 1950년 10월 이후의 전쟁사도 집필 여부를 고려하고 있다. 그는 “6·25 전쟁 전반을 다룬 저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방대하거나 비매품이라 일반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며 “정부나 단체가 아니라 참전했던 개인이 쓴 다큐멘터리 전쟁사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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