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쇠말뚝과의 첫 만남

처음 일제혈침(쇠말뚝)을 만난 것은「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1985년 삼각산 백운대에 박혀있던 쇠말뚝을 뽑을 때 참여 하면서부터였다. 이 쇠말뚝이 발견 되었을 때(1984년)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산 오르내림이라는 동호인 모임일 때다.

이 모임에서 백운대의 쇠말뚝을 뽑은 이듬 해 MBC T.V 방송국에서 再演을 요구함에 따라 백운대로 등정하는 데 참여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백운대에 박혔었던 쇠말뚝을 뽑고 난 뒤「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결성되었고, 具 潤書 씨가 회장으로 추대됐었다.

具 회장은 성품이 온화 강직했고, 우리민족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 옳은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은 이 시대의 참 된 선비였었다. 「우리모임」에서는 우리호칭 사용하기 캠페인을 버리기도 했고, 매년 음력 시월 삼일 개천절에는 民族魂 大祭라는 행사를 치렀다.

호칭 문제에 있어서는 미스 킴, 미스터 팍, 등으로 부르다가 우리의 姓氏가 없어지겠다는 걱정 끝에 남자는 박 선비, 여자는 박 선아, 즉 선비. 선아로 부르기 운동을 전개했었고, 민족魂 대제는 단군께서 古朝鮮을 開國天下 한 날(開天節)을 기리며 자연과 사람을 하나로 묶는 다는 의미를 내포한 행사였다.

그 당시 나는 일본 사람들이 산에다 쇠말뚝을 박아 산의 기맥을 잘라서 민족의 정기를 말살했었다는 것에는 회의 적이었다. 왜냐하면 많고 넓은 산천에 조그마한 쇠말뚝 몇 개를 박았다고 해서 산의 기맥이 잘리거나 또 산의 氣脈이 막혀서 生物學的 存在性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었다. 또 그 쇠말뚝이 박히므로 나쁜 영향을 끼쳤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발전 할 수가 있었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부터 이 일제혈침을 뽑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일본이 박았다는 확실한 기록의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놓고 회원들끼리 격렬한 논쟁을 버리기도 했었다.

삼각산 백운대 정상 바위에 박혀있던 쇠말뚝은 백운산장의 주인 할머니 증언에 따른 것이다. 당시 이 쇠말뚝을 발견한 사람들이(張 鉉泰 辯護士 中心으로) 이것을 누가 왜 이곳에 이런 모양으로 박았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느끼고 확인했었다. 그 과정에서 백운산장 주인 할머니로부터 일본 사람들이 박았다는 증언을 듣게 되었다.

「그 쇠말뚝은 우리 시아버지께서 왜놈들한테 끌려가서 박은 것이다. 그곳에 쇠말뚝을 박으면 조선이 망한다면서 박았는데, 시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꼭 뽑아야 한다고 하시다가 뽑지 못하시고 돌아 가셨다.」라고 했었다.

이 말을 들은 모임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풍수지리학자들에게 백운대정상이 일제가 쇠말뚝을 박을 만한 혈 자리인지, 한편으로는 산악인들이 암벽등반훈련을 하기 위해서 박은 것이 아닌지, 또 국립지리원과 지적공사에서 측량하기 위해서 박은 것이 아닌지 여부를 확인했었으나 산악회에서도, 국립지리원과 지적공사에서도 박은 사실이 없다고 확인이 됐고, 풍수지리학적으로는 백운대정상이 백회혈에 해당 된다고 주장했었다.(육관 손석우) 따라서 모임 사람들은 백운산장 할머니의 주장대로 일제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려 제거하게 된 것이다. 지적공사로부터는 이 쇠말뚝을 측량용으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측량에 대한 자료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측량용은 규격이 정해 져 있기 때문에 쇠말뚝 자체가 측량용일 수는 절대로 없다면서 측량용으로 오해 없기를 당부했었다.

《서기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이 극렬하게 전개되었고 이에 일제는 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악행을 자행했었다.

급기야 에는 내선일치라는 허울 좋은 말을 내 걸고 꼬드기기도 했다. 백운대에 쇠말뚝을 박은 그 주체는 식산은행장 와다 이치로(化田一郞)와 한성은행장(한일은행전신)韓相龍이라고 한다. 이들은 1927년 내선일치 정책에 동조하여 재계로부터 1.900원이라는 거금을 모아서 비밀리에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백운대 정상에 쇠말뚝 박는 작업을 진행했었다는 것이다.

목적은 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었다고 한다.》

이상 내용은 최근<2011년> 인터넷 사이트에 어떤 이가 올린 기사다.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다만 이 기사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뽑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던 사람은 徐吉洙(전. 서경대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박사였다. 서 길수 박사가 이것이 일제가 박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추정이 가능한 根據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 들를 많이 했었다.

「서 박사는 말이야 중 시줏돈과 교회의 염부 돈 이자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괴짜다. 그리고 뭐든지 한 번 작정하면 끝까지 돌진하는 명물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소개했었던 張 鉉泰 辯護士의 얼굴이 항상 뇌리에 떠있다.

 

필자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에 재직하면서 모든 종교단체의 실태를 조사, 연구 한 바가 있다. 그 결과 종교집단은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좋은 機械라고 결론을 내린바가 있는 터라 서 박사와는 자연스럽게 만나서 종교와 돈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었다.

만날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언어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에스페란토에 대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언어의 지배가 진정한 지배자라는 주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국적이 없는 에스페란토 어가 세계 공통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었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만날수록 존경과 신뢰의 탑이 쌓였다.

그는 이 일제쇠말뚝에 대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事例조사를 했었다고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집한 자료를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발간하는 <民族魂>에 발표했었다. 필자는 이 논문을 읽어보고 난 뒤부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이 쇠말뚝을 박은 일은 일제가 그 근거를 남길 수 없는 일일뿐더러, 日帝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넘치고 있는 村老들의 口傳을 안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구전에 따라 實物이 나타나고 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일본을 모함하기 위해서 꾸민 일이라면, 박았다는 시대가 들쭉날쭉하고 또 큰 인물이나 인재, 또는 장수가 태어나지 못하게 했었다는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일치한 구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村老들이 왜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서 말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뽑고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1985년>

또「설사 그들이(日帝) 맥을 자르기 위해서 박았든 기를 막기 위해서 박았든 박기는 저들이 박은 것은 확실하고 또 氣脈이 잘리지 않았어도 일제가 노린 呪術的인 문제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모두 제거하고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것은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동네 뒷산이 명산이었으나, 일본 놈들이 혈을 질렀기 때문에 이 부락에서 앞으로는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 심리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自暴自棄 하도록 했었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사상을 믿어 왔었다. 備邊司謄錄을 봐도 山訴를 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정승과 평민이 묘소문제로 임금에게 上疏를 올려서 임금이 평민의 손을 들어 준 사건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이런 문화정서를 깨고 마음에다 쇠말뚝을 박아 스스로 自暴自棄 하도록 한 주술로도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모든 희망은 일본 천황에 의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켰다. 이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라고 했다. 이 서 길수 교수의 설명을 듣고 그의 주장에 동화되었다.

 

서 길수 박사의 주장에 따라 깊은 冥想에 들어갔다. 자연과 나와의 관계에 꼼꼼히 생각해 봤다. 그 결론은 우주대자연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했다. 내 몸도 마찬가지다.

내 몸에 미세한 가시가 한 개 박혀도 아프다고 느낀다. 아프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신경이 거슬린다. 하물며 급소를 찾아 박은 쇠말뚝이 있다면 그 아픔은 지대할 것이다. 따라서 땅이 땅의 제힘을 못 쓰게 되고 그 영향은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生物에 미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東洋醫學에서는 任 脈과 督 脈과 12경락과 365경혈이 막혀 병이 생기게 되고 막혔던 혈(穴)을 뚫어서 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몸도 자연의 일부분임은 명상으로 확인된다. 일제가 저주한 쇠말뚝은 비록 산과 강과 바닷물 속에까지 박았지만 그 결과는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기로를 차단하여 사람이 제대로의 구실을 못하도록 加害한 독물임을 깨달았다. 자연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람 속에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쇠말뚝은 하루빨리 뽑고 땅의 원상을 복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日帝는 우리민족의 魂을 없애려고 별 수단을 다 썼다. 민족혼을 없애므로 써 민족의 뿌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악랄한 행위를 자행했었다. 역사왜곡이 그것이요,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킨 것이 그것이요, 창씨 개명한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미래의 큰 인물이 이 땅에서 태어남이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큰 인물을 못나게 막기 위해서 이 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잘라 없앤 더할 나위없는 악행이다. 어느 나라든 훌륭한 사람이 많이 태어나야 그 나라가 강성해지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 따라서 장차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태어 나도록하려면 이 저주의 일제혈침부터 제거하여 침적되어 있는 무의식 속의 독소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바탕은 땅이다. 그 땅이 괴로우면 땅위의 생물들도 영향을 받는 다는 『가이아』 이론을 상기해 봤다. 아프리카에서 팔락이는 나비 날개 짓이 아메리카에서는 태풍이 될 수 있다는 나비효과도 같은 맥락으로 음미했다.

2. 제보의 내용과 진실여부의 사례

1). 1993년 경상북도 상주 출신 이재훈 변호사가 보은속리산 문장대와 입석대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 박혀있다며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 제보 해 왔다. 이 때 현장 확인 조사를 필자가 自任하고 나섰다. 쇠말뚝에 대한 진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구전도 없이 제보한 것을 확인 조사란 쇠말뚝이 있긴 있지만 일제가 박은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리산 문장대까지 몇 번인가를 오르내려야 했었고 내 속리면 사내리 일대와 보은읍내까지를 헤매면서 老人亭과 속리산에 대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들을 찾아서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박았다는 증언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 때 속리산 문장대가 상주군에 속한 땅임을 미처 몰랐다. 이 변호사가 상주 출신이기에 제보를 할 수 있었음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헤매던 끝에 6.25당시 속리산 공비토벌대장을 했었다는 김종섭(당시 86세) 옹을 만날 수 있었는데, 「6.25당시에 속리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그 때는 문장대에는 감로천 쪽에 조그마한 것 두 개뿐이었는데 사변 뒤에 가보니 여러 개가 박혀있더라」고 했다.

「큰 것들은 문장대 바위 밑에서 감로 천으로 돌아가는 곳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위험 방지용으로 박았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에 앉은뱅이 여자와 조카라는 젊은이가 문장대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그 사람들을 찾아서 알아보면 그 쇠말뚝을 누가 박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기도 하였고 면사무소에 가서 도움도 청해서 옛날 문장대에 살았었던 젊은이는 김 영배라는 사람이고, 지금은 보은읍내에서 박수무당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의 한 달여 만에 김 영배 씨를 보은읍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만나서 문장대의 쇠말뚝이 발견 된 이야기와 또 그것을 누가 언제 왜 박았는지를 알기 위하여 찾아왔다고 설명하였다. 필자의 말에 그는 얼굴 가득히 슬픈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지난 날 그곳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자신의 이모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지으면서 그곳에서 생활했던 아픈 사연을 무려 5시간이 넘도록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양다리를 못 쓰는(앉은뱅이) 이모와 함께 살면서 문장대 꼭대기에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설치 해 놓고 그 앞에서 그의 이모가 등산 온 사람들에게 占을 봐 주고 얼마의 돈을 모았었는데 어느 날 서울에서 등산 온 학생이 감로 천으로 돌아 가다가 미끄러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 그의 이모가 그 동안 어렵사리 모았던 돈을 몽땅 털어서 石手를 시켜 위험 방지용으로 쇠말뚝을 박고 사람들이 甘露 泉으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시설(1960년)을 했었다고 한다. 쇠말뚝을 박고 시설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권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쇠말뚝을 여섯 개를 박고 부대시설을 한 것으로 그렸다. 그런데 감로 천 쪽에 있는 두 개는 그리지 않았다. 그 두 개의 쇠말뚝은 누가 박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기를 자르기 위해서 박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6개의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실제로 위험방지시설을 하는데 필요했었던 것이 인정되는 위치다. 甘露泉에 있는 것은 위험 방지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치였다. 결론은 8 개의 쇠말뚝 가운데 2개만 日帝가 박은 것으로 확인 됐었다. 여섯 개의 쇠말뚝이 첨에는 기다랗게 올라오게 박아서 판자를 깔아서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했었는데 뒤에 속리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상주군에서 올라온 부분을 잘랐다는 것이다.

 

2). 1994년 가을 배정석(2003사망)씨로부터 일본 해군 출신 「하야시」씨가 운명직전에 양심선언을 했는데 진도에 있는 죽도라는 섬 옆 바다 속에 혈침을 박았으니 꼭 뽑으라고 했다는 제보를 해 왔었다. 이때 최근에 사망한(1993년 사망<당시 86세>) 일본 사람의 양심선언으로 혈침이 박혀 있다는 사실이 實物로 확인이 된다면 이것은 일제가 혈침을 박았다는 귀중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여 그 일에 몰두하게 된 일도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매장물발굴과 연루되어 현재까지도 미확인으로 남아 있다.

 

3. 뽑은 수량 製作年代測定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여 구 윤서 회장이 안타깝게도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개함에 따라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모임이 해체됐다.

따라서 필자 단독으로 이 쇠말뚝 제거사업을 진행하기 시작 한 때는 1997년 2월부터다.

처음으로 뽑은 곳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鹿津의 바다 물속에서 3 개, 물 밖 언덕 베기 바위에서 1개 등 4개를 뽑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들 쇠말뚝이 박힌 바위 주변에는 빈 구멍을 뚫어 놓은 경우가 많다.

강화도 마리산에서는 쇠말뚝 4개가 박혔었는데 빈 구멍이 무려 49 군데가 뚫어져 있었고, 백운대에도 쇠말뚝 15 개에 3개의 빈 구멍이 있었고, 백도에도 쇠말뚝 26개에 8개의 빈 구멍이 뚫어 져 있었으며, 삼각산 탕춘대성 아래 독박 골 알 터에서도 쇠말뚝 3개에 4개의 빈 구멍이 뚫어 놓았으며, 연기군 동면 문주리에서는 銅침 9개에 21개의 빈 구멍이 뚫어 져 있었다. 이들 빈 구멍을 왜 뚫어 놓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쇠말뚝을 박아 氣路를 막고 주변에 빈 구멍을 뚫어서 精氣를 공중으로 분사시킬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이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처음 발견 할 때는 별로 못 느끼지만 뽑고 난 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氣感이 흐른다든가 하는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을 북쪽에서 올라가는 능선 층계 부근에 박힌 세 개의 쇠말뚝은 공교롭게도 좋은 氣가 왕성한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부근에 박혀있었다. 이 표지판은 인천시가 전문 기공사에게 용역을 주어 氣를 측정한 내용이다.

 

이 일제쇠말뚝은 갈라진 바위 틈새에 박은 것이 아니고 바위에 생 구멍을 박을 말뚝보다 약간 넓게 뚫어 쇠말뚝을 밀어 넣고 쇠말뚝과 바위 사이의 틈에는 백회가루를 흘러 넣어 바위와 쇠말뚝을 밀착시킨 뒤 윗부분은 시멘트로 마감 한 형태가 많다. 이렇게 박힌 쇠말뚝은 오랜 세월이 지나 쇠와 바위가 하나가 되어 쇠의 부식이 거의 안 된 상태로 있다. 그리고 이 쇠말뚝을 박은 구멍은 정으로 뚫은 것으로 추정된다.

 

設計者의 지시에 따라 구멍의 넓이와 깊이를 뚫었었다고 본다.

당시는 드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드릴이 있었다고 하드라도 전선이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정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박은 것으로 본다. 그렇게 했었다면 쇠말뚝을 박을 때 치밀한 계획에 따른 설계에 의해서 쇠말뚝의 굵기와 길이 등을 먼저 제작하여 시행되었을 것이며, 많은 공력을 들여서 박은 것으로 짐작 된다. 재질이 무엇이든 쇠의 소리가 맑고 여운이 길다. 끈으로 쇠말뚝을 묶어서 망치로 쳐 보면 종소리와 같이 난다. 이는 담금질을 할 때 특수한 열처리에 의한 것이 거나 합금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 두 개를 2001년 7월 서울대학교 기초과학 교육연구 공공기기원 <연대측정 담당 천명기 박사>에 年代測定을 의뢰하였었는데 2001년 8월 13일 <kbs 피플세상속으로> 라는 제작팀과 함께 서울대학 공공기기원으로 방문하여 확인했었다. 제작 년대가 3 만 년이라는 측정의 결과가 나왔다.

왜 그렇게 오래 된 년대가 나오는가를 물었더니 <년대 측정방법은 동이원소를 이용하여 탄소를 뽑아 측정하는데 그 탄소가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쇠말뚝을 만들 때 木炭으로 쇠를 녹인 것이 아니라 石炭으로 쇠를 녹였었기 때문에 그 석탄 속에 있던 化石의 탄소가 쇠 속에 들어갔고 그 쇠 속에 들어갔었던 탄소를 뽑아 년대를 측정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쇠를 구을 때는 석탄을 이용하여 다량으로 제작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18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석탄을 많이 썼었다고 한다. 이를 미뤄보아 백도에서 뽑은 쇠말뚝 제작은 일본에서 제작해 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백도에 박혔던 쇠말뚝>

 

3만년이나 되는 년대 측정 결과 자료가 필요로 느끼지 않아서 年代 測定結果 報告書를 받지 않았다. 서울대공공기기원에서는 보고서를 발행하지 않으면 年代 測定 料를 안 받는다고 했다. 돈을 주면서까지 불필요한 年代測定報告書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그 보고서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서를 안 받은 것을 뒤에 크게 후회하는 일이 발생했었다. 년대 측정 의뢰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오명을 쓰는 일이 있었다.

의뢰했었던 기록 자료가 서울대학교 공공기기원에 없기 때문이었다. 돈을 받고 보고서를 발행했어야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다. 미처 몰랐던 사항이었다.

동양양생원 신 동식 원장의 말에 따르면 1894년도에「가또 마루」(加藤丸)장군이 일본에서 쇠말뚝을 제작하여 백도로 가지고 와서 박았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일본에서 만든 것이 사실로 확인 된 셈이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것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많이 앞선다. 쇠를 석탄으로 녹인 것은 확실하다는 것은 확인 됐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까지도 대장간에서 목탄(숯)을 주로 이용하여 쇠를 달구었다.

4. 재질과 형태와 크기.

이들의 생김새도 각양각색이고 크기도 여러 가지다. 긴 것은 2미터가 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은 새끼손가락 만 한 것도 있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의 사달바위와 속리산 묘봉, 입석대, 거창군 가조면 우두 산의 장군봉 등에서 뽑은 것은 윗부분이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고, 삼각산 탕춘대성 아래 알 터에서 뽑은 것은 쇠말뚝의 중심에 총열과 같이 구멍이 관통 된 것도 있었다. 재질도 여러 가지다. 黃銅으로 육각이 된 것도 있고, 무쇠와 鑄鐵도 있다. 예술품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 진 것이 있는가 하면 철근을 잘라 박은 것 같은 것도 있다.

 

申 東植 씨의 제보에 따라 2001년도에 백도에서 뽑은 것은 1894년 가또 마루(加藤 丸)가 박았다는 것의 쇠는 몸통에 겹친 v자 무늬가 새겨 진 것도 있다. 가또 마루로 부터 40년 뒤인 1936년에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가 박은 것은 현재 건축용으로 쓰고 있는 이형철근이었다.

 

여러 곳에 박혔던 것의 형태는 ㄱ 자 모양으로 꺾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꺽쇠 모양도 있다. 거문도 덕촌 수월산 거문등대 옆에서 뽑은 것은 몸통을 쪼아서 고기의 비늘처럼 만든 것도 있고, ~ 이렇게 휘어지고 구부러진 것도 있다. 왜 이렇게 각양각색인지 그 이유는 저들 시행자들(日帝)만 알 것이다. 다만 침술사가 병의 종류에 따라 침을 큰 것을 사용 할 곳과 작은 침을 사용 할 곳이 다르듯이 이 혈침도 그러한 의미에 따라서 박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또 인체의 經絡이 手足에 있듯이 이 쇠말뚝도 높고 큰 산 꼭대기보다는 낮은 곳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개중에는 산의 정수리에 박힌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이 정수리가 높은 산의 정수리가 아니다. 야트막한 산의 정수리다. 제일 높은 정수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삼각산 백운대의 꼭대기 정도였다. 바닷물 속에도 박혀있다.

 

5. 제보 받은 곳과 확인한 곳. 뽑은 곳.

현재까지 쇠말뚝이 박혔다는 제보가 접수 된 자리는 300여 군데이고 이 가운데 확인을 거쳐 제거 한 곳은 46 군데이며 뽑은 것은 현재(2014년 1월)모두 378개다. 한 곳에 여러 개가 박힌 경우가 많다. 白島는 4개 구역에서 무려 26개나 뽑았으며 청량산(남한산성)에서는 5개 구역에서 74를 뽑았었다. 그러나 확인탐사를 하였으나 아직 찾지 못한 곳이 92곳이며, 나머지는 한 번도 확인 해 보지도 못 한 곳이다. 109 군데는 제보내용에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직 박혀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많지만 움직이는데 한계를 만난 실정이다. <뽑은 곳 현황은 별도 자료 기록 참조할 것.>

예를 들어 진도에는 尖察 산과 女貴 산이 있는데 이 여귀 산의 작은 봉우리에서 분명히 쇠말뚝이 박힌 것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으나 여러 번 탐사 길에 올랐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진도의 경우 이런 곳이 여러 군데나 된다. 임회면 하미의 뒷산 왕자바위, 진도군청 뒷산인 철마 산 정상, 굴포리 대섬 등이 그렇다. 진도에서는 녹진 사달바위 바다 물속에서 3개와 물 밖에서 1개를 뽑았을 뿐 다른 곳에 박혔다는 것은 아직 못 찾고 있다.

 

제보를 받고 애써서 찾아 갔으나 발견하지 못하면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고 놀림을 당한 것 같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강원도 두타산의 경우는 두 사람이 5일간이나 헤맸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경비도 더 든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을 만나서 막걸리 한잔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제천, 단양 영춘 면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불하고 함께 찾아 헤맸으나 못 찾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아무튼 전국적으로 제보를 받고 찾아 갔다가 못 찾고 헛걸음질 하는 경우가 연간 십 여 차례가 넘을 때도 있었다. 이는 이 쇠말뚝을 박은 지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 쇠말뚝을 박는 것을 보았거나 정확한 위치를 알던 사람들이 모두 늙어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렵고, 옛날과 달리 산의 숲이 우거져서 숲속에서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탐사를 겨울철과 봄철을 이용한다. 낙엽이 지고 잎이 피기 전에 찾기가 났기 때문이다.

6. 제보를 접수받고 뽑는 데 절차.

제보가 접수 되면 일단 현장을 탐사하여 실물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처음 제보 한 것 외에 주변에 더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 다음으로는 관할 시. 군. 또는 군부대나 산악연맹, 한전 등에 확인요청 공문을 띄워서 확인한다. 시. 군. 또는 군부대에서 안 박았다는 회신이 오면 인근에 거주하는 부락의 노인정이라든가 아니면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것이 일제가 박았다는 구전이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한다. 그리고 처음제보 숫자와 확인과정에서 더 많아질 경우도 있고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앞에서 밝혔지만 속리산 문장대의 경우 처음 제보는 8 개였으나 확인결과 2 개가 일제가 박았고 나머지 6 개는 안전시설물을 설치할 때 박은 것으로 밝혀졌었다. 이와 같이 숫자가 줄어 들 수도 있지만 대개는 주변에서 더 발견 되는 예가 많다. 백도에서는 처음에 제보 된 것은 8 개였으나 뽑는 과정에서 20 개나 더 발견 되었다. 모두 26 개를 뽑았다. 두 개는 아직 못 뽑고 있다. 발견이 되었다 하드라도 이것이 일제의 소행인지 아니면 등산하는 데 필요 했었던 것인지, 혹은 어부들이 배를 묶기 위한 것인지, 한전에서 철탑 세울 때 박은 것인지 또는 그 외의 다른 용도가 있었는지 여부를 수차에 걸쳐서 확인한다.

 

서산의 시멘트 말뚝의 경우는 풍수지리학자를 세 차례에 걸쳐 세 사람으로부터 확인을 받았었다. 그 자리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일제가 혈침을 박을 만한 위치인가를 확인 한 뒤 그 자리가 상당한 明地라는 것을 확인 한 후 일제혈침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서 몇 번이라도 현장을 탐사해야 한다. 쇠말뚝이 발견 된다고 해서 그냥 일제 소행으로 결론 내려 뽑는 것이 아니다. 이런 확인과정에서 경비와 정력이 많이 소모 된다.

 

처음부터 일제가 박았다는 제보가 있었다 하드라도 그 사실을 더 확인 할 수 있는데 까지 확인해서 일제의 소행으로 확실한 믿음이 갈 때 결론을 내린다. 현장의 탐사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의 상반 된 주장이 발생 되는 경우도 있다.

 

울산시 울주군 천전리 각석 건너 편 절벽에 박혔던 쇠말뚝을 울산향토사연구회 김재규 씨가 일제가 박은 혈침이라고 주장하면서 제보를 해 왔었다. 그러나 천전리 부락에 사는 손 진봉이라는 노인이 「그 쇠말뚝은 옛날 일제 때 최 경환 씨의 논에 물을 끌어 대기 위하여 수로를 설치했었는데 그 수로가 지나가는 나무수통을 절벽 난간에 달아 매기 위해서 박은 것이지 일제가 맥을 자르기 위해서 박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현장의 정황으로 볼 때 손 진봉 노인의 주장에는 신빙성이 없었다. 만약에 이 쇠말뚝이 나무로 된 수로 통을 달아매려고 했었다면 박혀있는 위치가 설명이 안 된다. 세 개 가운데 한 개는 바위 밑에 바짝 붙어 박혀 있기 때문에 이 쇠말뚝에 뭔가를 묶어서 달아 맬 위치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옆으로 계속이어서 나무로 된 수로 통을 연결 시켜야 하는데 절벽이 들쑥날쑥하고 다른 위치에는 쇠말뚝도 없었다. 손 노인에게 설명을 요구했었으나 「그 때는 그렇게 달아맸다.」고만 주장했었다. 억지를 썼다. 현장의 정황이 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종래는 현장에서 약 200미터 지점에서 3대 째 살고 있다는 박 연수 씨가 나서서 노인의 주장을 통렬하게 반박했었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들어왔었는데, 그 절벽에 박힌 쇠말뚝은, 일제 때 중리에 큰 장사가 태어나서 하루아침에 보(洑)를 수 십 마지기씩을 쳐 냈기 때문에 그것을 본 일본 놈들이 저 앞에 있는 장군 설진 등을 자르고 각석건너 편 절벽에 쇠말뚝을 박아서 앞으로는 큰 장사가 못나도록 했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최 경환 씨 논에 물 대기위한 水路는 그리로 간 것이 아니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통신용 전주가 서 있는 곳에서 다릿발을 세워서 저쪽 기도원 뒤로 물길을 내고 저 아래에 가서도 또 다릿발을 만들어서 세우고 반구대 방향으로 물을 끌어갔는데 어떻게 각석 건너 편 절벽으로 수로를 냈다는 주장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지금도 기도원 뒤에 그 때의 수로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장군 설진 등을 잘랐던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절벽으로 수로를 냈다고 주장하는 손 노인은 객지생활 하다가 고향으로 들어 온지도 얼마 안 돼서 마을 내력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다.

결국 박 연수 씨의 주장에 따라 확인조사를 한 결과 신뢰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각석 건너 절벽의 쇠말뚝 세 개를 일제혈침으로 결론을 내리고 제거한 뒤 원상복구를 마쳤다.

뒤에 밝혀진 서글픈 이야기는, 일제 때 이 고장에서 면장을 지냈었던 사람의 아들이 학교 교장을 하다가 정년퇴직을 했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면장 할 때 이 쇠말뚝이 박혔으므로 그때 상황을 바꾸려고 손 노인을 앞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가 박은 것으로 결론이 나면 먼저 날 자를 정하여 告由祭를 모신다.

이 고유제를 모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 땅을 인체와 같이 보고 독침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부득이 훼손해야 하므로 그 훼손시키는 과정에서 고통이 있어도 참아달라는 뜻이 있고, 또 박혀 있던 쇠말뚝을 제거 하겠다고 자연에 알리는 의식이다.

 

뽑을 때는 가능한 한 최소의 훼손을 위하여 정으로 쇠의 주변바위를 뚫고 들어간다.

깊이 박힌 것은 시일이 많이 걸린다. 주변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적합했었다. 장소에 따라서는 작키를 사용 할 때도 있지만 대개가 평면에 박히지 않아서 드문 경우다. 작키를 사용하드라도 잘 못하다가는 작키가 튀어서 위험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뽑고 나면 그 뽑힌 구멍은 뽑을 때 생긴 돌가루를 모았다가 되 메우고 부족한 것은 같은 장소의 돌을 깨어서 가루로 만들어 채워 넣고 다져 원상을 회복시킨다.

이렇게 원상복구를 완료하면 대개 수개월 이내에 뽑았던 구멍이 원상회복이 된다.

속리산 입석대 에서는 뽑고 난 뒤 7 일 만에 뽑았던 구멍을 메우고 원상 복구하러 갔었는데 입석대 꼭대기에 있어야 할 구멍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함께 작업했었던 인부들과 필자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 전율을 느꼈다.

모든 물질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임을 강하게 깨달았다.

원상복구가 끝나면 正安祈願祭를 모신다.

이제 원상복구를 하였으니 새로운 힘으로 쇠말뚝이 박힘으로 써 발생 됐었던 모던 재앙을 소멸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지해와 힘을 달라는 기원이 포함 된다.

 

7, 과연 일제가 혈침(쇠말뚝)을 박았었던가?

저들이 스스로 혈침을 박았다는 자료를 공개하고 스스로 박은 이유를 밝힌다면 더 좋을 나위가 없겠지만, 현재까지의 일본인의 개인적인 양심선언 적 실토와 전국 방방곡곡에서 접수 되고 있는 제보 내용에 따라 실물이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일제가 혈침을 박았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저 승냥이 같은 것들이 이 쇠말뚝을 자기네가 박았다고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다.

 

하지만 개인은 다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야마시타 도모유끼」(山下奉文)장군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체포되어 전범자로 처형되기 직전에 자신의 통역관이었던 신세우(신 동식 씨의 부친, 1988년도에 타계 함)씨에게 良心 宣言한 자료를 박정희(1962년)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전하여 박 장군의 진두지휘로 많은 혈침을 제거 했었다고 신 동식(현,동양양생원 원장)씨가 주장하고 있다.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지하 18미터 땅 속에서 화강암으로 된 석침 12개를 캐 낸 증거자료가 있다. <창덕궁 인정전 뒤에서 1995년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 5일간 신 동식 씨가 작업으로 캐냄.> 야마시타의 제보내용은 창덕궁 수라간 장독대에서 좌로 9보, 우로 9보 위치에서 지하 18미터를 파면 석침이 나올 것이니 파내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대로 실행하여 캐낸 물증<사진 있음>이 있다.

 

둘째, 역시 「야마시타 도모유끼」의 제보에 근거하여 無人島인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백도(무인도)에서 필자가 직접 6개월 간 26개의 쇠말뚝을 뽑은 것이 그 증거다. 「야마시타」의 실토에 의하면 이 백도의 쇠말뚝은 “1894년에 「가또 마루」(加藤 丸)장군이 일본에서 곧장 백도로 와서 혈침을 박고 다음해인 1895년에 명성황후를 弑害했었다.”고 했으며 그 뒤 1936년에는 「야마시타 도모유끼」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백도에다 혈침 12개를 박았었다는 것이었는데 필자가 뽑은 26개의 혈침 가운데 14개는 몸통에 V자 무늬가 겹으로 새겨져 있었고 다른 12개는 굵은 철근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 두 종류의 쇠는 재질과 형태도 다르고 부식 된 정도를 보면 확실히 상당한 세월의 차이가 있었다. 「가또 마루」가 박았다는 1894년에서 꼭 40년 만인 1936년에 「야마시타 도모유끼」가 박았다는 이 두 종류의 쇠말뚝의 材質이나 腐蝕정도는 육안으로 보아도 표가 나기 때문에 그의 실토를 신뢰 할 수가 있다고 본다. <백도에서 뽑은 26개는 현재 여수시에서 보관 중.>

 

셋째, 일본 해군 출신인「하야시」<이 하야시라는 이름은 필자가 작명. 이유는 그가 양심선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했었다고 해서다.>가 1993년(당시 86세) 임종 시에 양심선언으로 제보 된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대섬 옆에 혈침을 박았다는 제보내용의 스토리를 분석해 보면 신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다만 바다 속이라는 특수한 현장의 여건과 매장 물과 관련이 돼 확인 작업이 중단 된 상태다.

 

마지막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膾炙되고 있는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일본 사람들이 혈을 질렀다, 맥을 잘랐다, 쇠말뚝을 박았다, 목침을 박았다, 라는 등 村老들의 口傳에 의해서 實物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제혈침은 실제로 존재하는 毒物이다.

 

8. 혈침(쇠말뚝)을 박은 주체는 일본 神道集團

일본에는 神을 믿는 단체가 많다. 그들 많은 단체가운데 天皇家를 포함한 극우 단체가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특수한 신비설을 많이 믿고 있다. 지금도 많은 세력들이 신비주의를 믿고 있다. 일본총리가 주변국과 마찰을 무시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정상적인 풍수지리학적 學問으로 접근 될 문제로 보기는 어렵고, 일본의 독특한 神道主義 <神祠>들의 秘方術策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연을 접근하는 神道의 秘術이 극성스러움은 신을 신봉하는 집단의 수가 많은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혈침을 박은 설계자의 主體는 일본의 天皇家를 포함한 神道主義者들이었고, <가또마루 장군이 일본에서 위로부터 지시를 받고 곧 바로 백도로 와서 혈침을 박았다>는 그 위가 바로 일본천황이나, 아니면 天皇家 주변 신또주의의 우두머리라고 본다. 실행자는 軍이 으뜸이었다고 본다. 하기 때문에 이 쇠말뚝을 박은 자료나 기록은 천황가의 황실서고나 기타 황실 주변에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측 해 본다.

 

조선총독부가 앞장서서 한 것은 아니다. 조선 총독부가 이 땅에 생기기 전에 이미 이 강산 곳곳으로 몰래 잠입하여 쇠말뚝을 박았음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가또 마루」가 1894년도에 백도에 쇠말뚝을 박은 것은 경술국치(1910년)보다 15년 전의 일이었었다.

조선총독부는 본국(天皇家 또는 神道 信奉 우두머리)에서의 각본에 따라서 음성적으로 사업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1916년에 조선총독부건물을 지을 때 일본 풍수사 11명이 들어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역할도 의심을 해 볼만 하다. 하지만 자료가 너무 없다.

1894년에 「가또 마루」장군이 백도에 혈침을 박을 때도 청. 일 전쟁이 한창이었고 노. 일 과도 전운이 짙은 가운데도 전쟁터로 가지 않고 위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본에서 곧장 백도로 와서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을 보면 조선총독부에서 앞 선 일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본국 상층부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설계하여 실행 해 왔었다고 볼 수 있다.

백도에다 혈침을 박은 1894년에서 15년 만에 조선을 말아 먹었다. 이들은 이미 조선을 강탈 할 모든 계획을 오래전에 수립 했었고 그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는데 그 가운데 땅에 혈침을 박아서 땅의 힘을 누르는 일을 제일 먼저 추진했었다고 볼 수 있다.

 

거문도 등대가 있는 수월산에서 발견 된 쇠말뚝의 부식으로 보아 「가또마루」가 백도에 박았을 무렵의 것으로 보인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심한 부식상태가 그렇게 보인다. 또 거문도 등대가 1904년도에 준공이 되었는데 이곳에 쇠말뚝이 박힌 위치를 보면 등대가 세워지기 전에 쇠말뚝이 먼저 박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전국 각처에 여러 곳에 쇠말뚝을 박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몰래 潛入해서 말이지.

 

다시 말해서 이 쇠말뚝을 박은 시기는 1894년, 즉 한. 일 합방<庚戌國恥> 훨씬 이전부터 시작하여 광복 이 되던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행해 진 것으로 口傳으로 전해진다.

왜냐하면 지금 청와대인 조선총독부 관저에는 그들이 철수하면서 박아 둔 것을 1964년 신세우(신 동식 씨 부친)씨가 박 정희대통령에게 고하여 제거 했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2010년 7월 13일 일본 동경방송<tbs>한국지국장 쿠사카베 마시키(日下部 正樹)가 필자의 집으로 방문했었다. <올해가 한.일 합방 100주년을 맞는 해 이므로 일제혈침에 대한 뉴스를 본국(일본)에서 방영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방문했다>고 했었다.

이 때 쿠사카베 마시키 국장이 <일본에서는 집을 지을 때 땅의 지세가 세면 그 기를 누르기 위하여 터에다 쇠말뚝을 박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 해치는 일이 아니라.>고 말 했다.

<이 날 한 인터뷰와 촬영한 내용은 2010년 9월 2일 일본 東京放送에서 방영 됨.>

땅에 쇠말뚝 박는 일이 사람들을 해코지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정서로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말인가? 이는 일제가 혈침을 박았었다는 사실을 간접시인 한으로 느꼈다.》

 

9. 일제혈침이 이 땅에 박힘에 따라 겪은 우리의 재앙.

이 혈침이 이 땅에 박히면서부터 우리민족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되었다고 본다.

1894년에 「가또 마루」가 백도에 혈침을 박은 1년 뒤 1895년에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 했었다는 「야마시타 도모유끼」의 실토처럼 명성황후가 저들로부터 잔인하게 시해 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껏 저들은 명성황후 시해 사실을 엄폐하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딱 10년 되던 해인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乙巳勒約)이란 감언이설을 앞세워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았고 1909년에 간도를 청나라에 팔아 넘겼으며 야금야금 조정을 파고들어 1년 만인 1910년8월28일에 경술합방(庚戌國恥)으로 이 나라의 국권을 송두리째 강탈 해 갔었다. 저 狡猾한 근성을 우리는 어리석게 잊어버리고 있다.

 

이 땅에 혈침이 박혀 땅이 힘을 잃었기에 이 땅 위에 살고 있던 지식인들은 저들에게 맥을 못 쓰고 고개를 숙였다. 따라서 나라의 민초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을 36 년간을 견뎌야 했었고 독립을 염원 하던 많은 의사, 열사들은 저들의 잔혹한 고문과 총 칼에 처절한 생애를 마감 했을 뿐 아니라, 끝내는 外勢에 의하여 스스로의 독립을 포기 당했으며, 국토와 민족이 반쪽으로 갈라져 불쌍하고 가련한 민족으로 전락되어 있다.

 

뿐인가? 급기야 수백만 명의 생명이 戰場의 이슬로 사라 졌으며 국토전역이 초토화가 되는 역사이래로 최악의 전쟁인 6.25동란이라는 同族相殺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지금도 38선을 사이에 두고 부모형제가 생이별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일촉즉발 남북전생이 재발 할 위기의 상황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의 呪術이 학문적이거나 아니거나 따지기 전에 그 저주의 주술은 통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주술의 멍에를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은 이 쇠말뚝을 뽑고 땅의 원상을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남녘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실토에 근거하여 1962년부터 박 정희 장군이 신세우 씨를 만나게 되어 이 毒針을 제거하기시작 하였으므로, 저주의 멍에를 벗어나 지긋지긋했었던 보릿고개가 없어지고 백성이 주인인 民主主義가 되어가고 있지만 북녘 땅은 아직도 기아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바로 이 일제혈침의 詛呪에 의한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굶주림의 고통이 常存하고 있다고 본다.

북녘 땅에도 1.000여 개 이상이 박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일제혈침을 모두 뽑아내고 원상복구를 다하면 반드시 평화로운 방법으로 남북이 하나로 되어 정상적인 나라로 새롭게 탄생하리라고 굳게 믿는 바이다.

 

10. 맺는 말

앞에서 밝혔지만 이 쇠말뚝은 학문적인 방법으로 접근 할 근거는 매우 희박 하다.

왜냐하면 이 쇠말뚝을 박은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鬼神 믿는 자들의 秘術, 또는 秘方에 따라 저질러 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풍수지리학으로 접근 했다가는 오히려 저들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마치 우리가 저질러 놓고 일본에 덮어 쉬운다는 식으로 함정으로 몰고 갈 우려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 새로운 觀을 새우는 데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박히기 시작했었던 1894년(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증언을 토대로)과 뽑히기 시작한 1962년 그 전과 후 이 땅위에서 일어났었던 일들을 우리는 조용히 명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랜 옛날부터 아교처럼 붙어있던 보릿고개가 남녘엔 없어졌다. 북녘은 아직도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은 이 일제혈침과의 관계가 확실히 있다고 본다.

 

일제가 큰 인물이 못 나도록 박았다는 口傳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 풍수학설에서도 그럴 사 한 위치에 박혔다고 확인 되는 것은 혈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설사 그러한 口傳이 없더라도 재질이 黃銅이거나 鑄鐵이거나 만들어진 모양이 일반 용도가 아닐 때도 혈침이라고 결론을 내릴 때도 있다. 왜냐 하면 일본 사람들이 아니면 高價의 재질로 쇠말뚝을 만들어 높고 깊은 산골 바위 등에 필요 없이 힘들여 박을 사람은 그들 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것들을 박은 그 옛날에는 우리의 경제는 쇠똥가리 하나 구하기도 엄청스럽게 어려웠었으니 누가 쓸데없이 귀한 쇠를 이유 없이 산과 바다, 계곡의 바위 등에 힘들여 박았겠는가? 이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땅을 미워하거나 질시하는 그 놈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뽑는데도 어렵고 힘이 들지만 박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저들은 이 氣(神經線)路나 血路를 훼손한 그 목적은 한국 땅에서 태어 날 훌륭한 優性因子를 劣性因子로 바뀌게 해 달라는 詛呪의 呪術이 注入 된 極惡處方으로 본다.

훌륭한 사람이 못 나도록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은 바로 그 말이다. 마지막엔 생물학적 고리에 주술을 건 것이다. 태어나고 주검은 생물학이다. 그 과녁을 겨냥한 독화살과 같다. 때문에 남과 북을 막론하고 하루 빨리 이 혈침을 제거하여 땅의 원상을 회복(地氣)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 땅에서 훌륭한 人材들이 많이 태어나도록 말이다.

 

풍수지리학은 자연과학에 있어 중요한 학문이지만 단순한 지리, 지형만을 가지고 氣脈, 地脈 등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원 바탕으로 볼 수 있는 별자리 즉 天文學을 연구하여 지리학과 함께 엮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단순한 풍수지리개념에 묶여서 大自然의 尨大하고 복잡한 多經을 설명하지 못한 체 머무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부 풍수지리 학자들이라고 지적해 둔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좀 더 깊이 연구하시기를 풍수지리학자님들께 촉구한다.

일본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행동을 일렬종대로 정리해 보면

첫 째, 이 땅에 쇠말뚝 박기(1894년 이전과? 이후~).

둘 째, 명성황후 시해하기(乙未事變. 1895년). <이 때부터 이 땅의 主權이 쇠약해 짐>

셋 째, 외교권 박탈하기(乙巳保護條約. 1905년).

넷 째, 간도 땅 청나라에 팔아먹기(1909년)

다섯째, 국권 송두리 체 강탈하기(庚戌合邦. 1910년).

여섯째, 강제 神社 參拜시키기.(1915~1945년)

일곱째, 강제 創氏改名하기.(1940년 2월 11일부터).

여덟째, 敗亡.(1945년).<명성황후 시해한 1895년부터 1945년 패망까지 50년이 걸렸다.>

아홉째, 다시 침략 전략으로 독도를 저희 것이라고 물고 늘어지기(2000년).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가? 이는 이 본토 땅을 또 노리는 수작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침략 한 것이 아니라고 간사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쇠말뚝박기 시작인 1894년부터 2013년까지 119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이 땅을 노린다. 저들이 말하기를 침략이란 군병을 앞세워서 쳐들어오는 거란다. 조선왕조시절에 군사를 앞세워 쳐들어오지 않았기에 침략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말에는 일리가 있다. 저들은 세치 혀 바닥을 간사하게 놀려서 詐欺를 쳐서 조선을 노략질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교활한 입짓과 몸짓으로 우리를 겁박하고 현혹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이 일제혈침을 뽑는다. 혹자는 필자를 편협한 민족주의자라고 힐난 한다. 얼토당토않은 일을 일본이 저질렀다고 덮어 쉬우는 사람이라고 비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쇠말뚝의 독소는 그 효과가 있는 實存의 상황이고 이것을 뽑고 원상복구를 해야 對 일본 관계가 진실한 선린관계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아픈 앙금이 깊게 쌓여 앞날에 양국이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지속 될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유발시킬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광복이후 십 수 년 간 묻혀 있다가 1962년부터 불거져 나왔던 일제쇠말뚝 문제가 50년이 넘도록 정리가 안 된 체 오늘까지 남아 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62년부터 고 박 정희 전 대통령이 관여를 해서 제거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 모두 마무리를 했었어야 할 문제였지만 당시 한. 일간 國交正常化를 추진하는 데에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서 시끄러운 분위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을 제거한다고 밝힐 수 없어서 특수한 사람들만 알고 조용조용히 뽑아 온 바람에 많은 곳이 빠져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남녘땅에 박혔던 것은 95% 이상 뽑고 원상복구가 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북녘 땅에 박힌 것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북녘 땅 개성지구, 천마산, 송악산, 진내산 등에 여섯 개 내지, 아홉 개가 박혀 있다하며 2011년 11월에 로이터 통신을 통해 보도했었고, 금강산 수정봉에도 무더기로 박혀있다는 것도 언론매체로 밝혀진지는 오래다. 이 외에도 황해도와 함경도 등에도 박혀있다는 제보가 접수 돼 있다. 북녘 주민들의 굶주림을 없애려면 이 일제혈침부터 뽑아 없애야 하는데 이것을 뽑으러 갈 길이 막막하다.

 

남과 북이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며 일제쇠말뚝을 남김없이 뽑아버리면 우리 땅 地脈에 回復彈力性이 생겨 훌륭한 인재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 세계로부터 가장 추앙받는 훌륭한 나라로 승화 될 것을 확신하면서 말을 맺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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